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모임 초대장이 와도 선뜻 나가기 어렵다. 통장 잔고가 머릿속을 스치고, 다음 달 월세 걱정이 발목을 잡는다. '그냥 피곤해서'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동시에 힘들어서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청년들은 취업난, 주거 불안, 관계 단절이라는 세 가지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다. 각각의 문제도 벅찬데 세 가지가 한꺼번에 덮쳐오면 마음은 어떻게 될까. 심리학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스트레스 연구의 권위자인 수잔 폴크먼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는 '자원 고갈 이론'을 제시했다. 취업, 주거, 관계 중 하나만 흔들려도 심리적 자원이 크게 소진되는데, 세 가지가 동시에 불안정해지면 회복탄력성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2024년 만 19세에서 34세 청년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1.3%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대인관계를 스스로 줄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돈이 없어서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친구를 만나지 못하니 외로움이 쌓이고, 외로움이 쌓이니 취업 의욕마저 꺾이는 악순환이 수치로 드러난 것이다.
이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세 가지 어려움을 동시에 경험한다고 응답한 청년의 우울감 점수가 한 가지만 경험한 청년보다 2.8배 높았다는 사실이다. 문제가 더해지는 게 아니라 곱해진다는 뜻이다.
세 가지 고통 중에서도 심리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관계의 단절이다. 취업이나 주거는 상황이 바뀌면 회복될 여지가 있지만, 한번 끊어진 인간관계는 재건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로빈 던바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진정한 친밀감을 형성하려면 최소 200시간 이상의 공유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청년들이 경제적 압박을 받을수록 관계를 가장 먼저 '비용 항목'으로 계산한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철수(social withdrawal)'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자발적 선택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연결감 자체를 잃어버려 나중에 관계를 원해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매슈 리버먼 미국 UCLA 심리학과 교수는 뇌 영상 연구를 통해 사회적 고립이 실제 신체 통증과 동일한 뇌 영역을 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을 밝혔다. 친구를 못 만나는 게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라, 뇌가 느끼는 진짜 고통이라는 의미다.
취업 서류를 수십 번 내고 연락이 없고, 마음에 드는 집은 보증금이 턱없이 부족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있는데 밥 한 끼 사줄 여유도 없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꺼진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명명한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 이 바로 그것이다.
학습된 무력감은 반복적인 실패 경험이 쌓이면서 '어떻게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이 굳어지는 현상이다. 처음에는 특정 상황에만 해당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삶 전반으로 퍼져나간다. 취업이 안 된다는 느낌이 나는 능력이 없다는 확신이 되고, 결국 도전 자체를 포기하는 단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셀리그먼 교수 팀이 청년층 장기 실업자 380명을 3년간 추적한 연구에서 실업 기간이 18개월을 넘어서면 구직 활동 자체를 포기하는 비율이 54.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된 좌절이 뇌의 동기 시스템 자체를 바꿔버린 결과라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3중고의 덫은 분명히 구조적인 문제다. 청년 개인의 노력만으로 당장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심리학 연구들은 한 가지 일관된 메시지를 전한다. 아무리 작은 사회적 연결이라도 유지하는 것이 무력감의 확산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막이라는 것이다. 바버라 프레드릭슨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하루 한 번 이상 타인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울감이 33% 낮고 다음 날의 행동 의욕도 유의미하게 높았다.
비용이 들지 않는 연결이면 충분하다. 카페에서 함께 각자 공부하기, 짧은 음성 메시지 하나 보내기, 동네 러닝 모임에 한 번 나가보기. 관계를 다시 쌓는 데 거창한 계획은 필요 없다. 오늘 문득 생각나는 친구에게 '요즘 어때?'라는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의 마음도, 상대방의 마음도 그 한 문장으로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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