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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대리가 부장이 되고, 그 부장 밑으로 더 어린 후배 부장이 들어온다. 직함은 그대로인데 서열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밀리고 있다. '만년 부장'이라는 단어가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왜 떠나지도 못하고 그냥 버티는 걸까.
최근 한 보고서에서 70년대생 직장인 부장들 중 상당수가 창업을 꿈꾸면서도 건강 걱정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이 복잡한 심리, 심리학에는 꽤 명확한 설명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미 투자한 시간과 노력 때문에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계속하는 현상을 '매몰비용 오류(Sunk Cost Fallacy)'라고 부른다. 대니얼 카너먼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이 개념을 손실 회피 이론과 연결해 설명한다. 사람은 이득을 얻는 기쁨보다 손실을 보는 고통을 약 2.5배 더 크게 느끼기 때문에, '지금 그만두면 20년이 날아간다'는 생각이 이성적 판단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43세 부장이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면서도 회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 익숙한 관계, 반복해온 루틴을 포기하는 것이 새로운 가능성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겁게 느껴진다. 실제로 버리는 게 아니라, 뇌가 그렇게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2019년 미국 심리학회(APA) 연구에 따르면 중간 관리자 직급에서 10년 이상 정체된 직장인의 68%가 이직 의향은 있으나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 1위가 '지금까지 쌓은 것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중년기를 '생산성 대 침체'의 시기로 정의했다.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이 없을 때, 사람은 깊은 심리적 침체에 빠진다. 오랫동안 '부장'이라는 직함과 자신을 동일시해온 사람일수록, 그 자리를 잃는 것이 단순한 직급 변화가 아니라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런 제임스 미국 UC어바인 철학·심리학부 교수는 직장 정체성 연구에서 '역할 융합(Role Fusion)' 현상을 설명한다. 개인이 자신의 직업적 역할을 자아 개념의 핵심으로 통합할수록, 그 역할이 위협받을 때 자존감 손상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43세 부장이 창업을 '꿈꾸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지금의 직함을 잃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무섭기 때문이다.
여기에 창업에 대한 '결과 공포'까지 더해진다. 실패할 경우 직장인 시절의 자신보다 더 낮은 사회적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두려움, 즉 심리학에서 말하는 '하향 비교 불안'이 행동을 막는 또 하나의 벽이 된다.
보고서에서 70년대생 부장들이 창업 의향은 있으나 '몸이 따라줄지 걱정된다'고 답한 것은 흥미롭다. 물론 건강 걱정은 현실적인 고려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여기서 한 겹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를 '합리화된 회피(Rationalized Avoidance)'라고 한다. 변화가 두려울 때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로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발표한 정서 조절 연구에 따르면, 불안을 유발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의 약 57%가 상황 자체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조절한다. 건강 문제를 이유로 들면 주변의 이해도 얻을 수 있고, 자신도 '무서워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납득시킬 수 있다. 뇌는 이 과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처리한다.
물론 이것이 당사자를 탓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심리 메커니즘은 극도로 정상적인 자기 보호 반응이다. 다만 이 패턴을 알아채지 못하면, 진짜 두려움과 마주하지 못한 채 10년이 또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버티는 것과 안주하는 것은 다르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제시한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작은 성공 경험이 쌓일 때 비로소 더 큰 변화에 도전할 용기를 얻는다. 창업이 두렵다면 부업 한 가지, 주말 강의 한 번, 관심 분야 세미나 참석 한 번부터 시작하는 것이 유효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시도하기 어렵다는 통념도 사실이 아니다. 카리나 슈만 미국 피츠버그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성인 24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2년 연구에서, 40대 이후에도 의도적인 자기 노출과 소규모 행동 실험을 반복한 집단은 자존감과 심리적 유연성이 유의미하게 높아졌다. 늦은 게 아니라,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뿐이다.
오늘 당장 창업 계획서를 쓸 필요는 없다. 그냥 '내가 진짜 두려운 게 뭔지' 종이에 한 줄 적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매몰비용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첫 번째 발걸음은,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이름 붙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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