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경기 중 항의하는 선수에게 심판이 던진 한마디. "예민해, 생리하나?" 지난 28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WK리그 수원FC위민 대 서울시청 경기에서 배선영 주심이 선수에게 했다는 이 발언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들끓고 있다. 단순한 '막말 해프닝'으로 넘기기에는, 이 한 문장이 담고 있는 심리적 무게가 너무 크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발언을 '젠더 기반 폄하(gender-based denigration)'라고 부른다. 상대의 감정이나 주장을 생물학적 성별과 연결해 무력화시키는 언어 전략이다. 경기장 위에서 심판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던진 이 말 한마디는 선수 개인을 넘어, 여성 스포츠 전체에 대한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심리학에서는 '권위 편향(authority bias)'이라는 개념이 있다.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말은 같은 내용이라도 훨씬 크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경기를 지배하는 심판의 발언은 동료 선수나 관중의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규칙을 집행하는 자리에서 나온 언어는 곧 '공식적 판단'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클로드 스틸 교수가 1990년대부터 연구해 온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 이론은 이 맥락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스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특정 집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이 환기되는 순간,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은 실제 수행 능력이 최대 20% 이상 저하된다. "생리하나"라는 한마디는 선수에게 '넌 지금 감정 조절을 못 하는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을 즉시 떠올리게 만든다.
이 심리적 충격은 그 순간의 경기력에만 그치지 않는다. 2022년 영국 스포츠심리학저널에 실린 연구에서는 여성 운동선수의 63%가 경기 중 성별 관련 발언을 들은 경험이 있으며, 그중 78%는 이후 자기 효능감이 뚜렷하게 낮아졌다고 응답했다. 말 한마디가 선수의 자신감을 오랫동안 갉아먹는 것이다.
이 발언이 특히 문제적인 이유는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의 전형적 패턴이다. 상대의 감정과 인식을 틀렸다고 규정하며,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의 신체나 심리 상태로 돌리는 방식이다. "예민해"라는 말은 '네 항의가 정당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생리하나"는 '그게 네 신체 때문이다'라는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한다.
이런 언어 전략은 피해자로 하여금 '내가 정말 과민반응한 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심리학과 제니퍼 프리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권위자로부터 가스라이팅성 발언을 들은 개인은 이후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능력, 즉 '자기 신뢰감(self-trust)'이 장기간 손상될 수 있다. 선수가 자신의 몸과 감정을 다시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경기 이슈를 넘어선다.
더 넓게 보면, 이런 발언은 '여성 선수는 감정적이다'라는 오랜 편견을 경기장 안에서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심판은 중립적 판단자여야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젠더 편견의 전달자가 됐다.
이번 사건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심리적 현상이 있다. 바로 '제도적 침묵(institutional silence)'이다. 보도에 따르면 심판에 대한 징계 여부와 수위는 공개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행이 반복될 때, 피해 당사자와 목격자들의 심리에는 무엇이 쌓일까.
조직심리학자 에이미 에드먼슨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교수가 제안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 개념에 따르면, 구성원이 자신의 발언이나 행동이 처벌받을까 두려워하지 않아야 조직이 건강하게 작동한다. 징계가 불투명하게 처리될수록, 여성 선수들은 앞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지를 학습하게 된다. 이것이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의 경기장 버전이다.
1975년 마틴 셀리그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처음 정립한 학습된 무력감 이론에 따르면, 반복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노출된 개인은 실제로 변화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시도를 포기하게 된다. 징계가 흐지부지될 때, 그 메시지는 선수들에게 은연중 전달된다. '항의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을.
스포츠 현장은 단순히 기술과 체력만 겨루는 공간이 아니다. 수많은 심리 전문가들이 강조하듯, 선수들의 자기 개념, 자존감, 동기 수준이 모두 그 환경에서 만들어지고 무너진다. 특히 청소년 선수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그 영향은 훨씬 더 깊고 오래간다.
캐나다 올림픽위원회의 심리 지원 프로그램을 연구한 케롤린 불 캐나다 토론토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팀의 2021년 연구에서는 코치나 심판의 젠더 비하 발언에 노출된 여성 선수의 운동 지속 의지가 그렇지 않은 선수보다 평균 34% 낮게 나타났다. 말이 선수를 운동장 밖으로 밀어낸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 주변의 운동장, 교실, 회의실에서도 비슷한 말들이 오가고 있지는 않을까. "예민하다"는 말로 누군가의 정당한 분노를 가볍게 눌러버린 적은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누군가의 감정을 신체 탓으로 돌리는 한마디가 얼마나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이번 사건이 똑똑히 보여준다. 당신 곁의 누군가가 "나 좀 예민한가?"라고 묻는다면, 먼저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물어봐 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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