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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심 어린 사과'라고 답한다. 방송인 박수홍이 항공기 탑승 과정에서 빚어진 연착 소동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터넷은 금세 두 편으로 나뉘었다. '받아들이겠다'는 쪽과 '이미 늦었다'는 쪽.
사과를 둘러싼 이 갈등, 사실 우리 뇌 안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심리전이다. 왜 어떤 사과는 마음을 녹이고, 어떤 사과는 오히려 분노에 기름을 붓는 걸까. 심리학은 이 물음에 꽤 구체적인 답을 갖고 있다.
사과를 들을 때 우리 뇌에서 가장 먼저 반응하는 곳은 이성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이 아니다. 감정을 처리하는 편도체(amygdala)가 0.1초 만에 '이 사과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먼저 판별한다. 타냐 싱어 독일 막스플랑크 인지·뇌과학연구소 소장은 사과를 받는 순간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는지 여부가 사과의 진정성 인식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fMRI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문제는 편도체가 단어 자체가 아니라 맥락과 타이밍을 함께 읽는다는 점이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동일해도, 사건이 터진 직후 자발적으로 나온 사과인지, 여론이 끓어오른 뒤 어쩔 수 없이 나온 사과인지를 뇌는 금세 알아챈다. 이 때문에 '뒤늦은 사과'는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귀인 이론(Attribution Theory)'으로 설명한다. 버나드 와이너 미국 UCLA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정립한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상대의 행동이 내적 동기에서 비롯됐는지, 외적 압력에 의한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구분한다. 여론의 압력을 받고 나온 사과는 '외적 귀인'으로 분류되어 진정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모든 사과가 같은 효과를 내지 않는 이유는 뭘까. 로이 르비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경영대학원 교수 연구팀이 2016년 성인 75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에서 효과적인 사과에는 6가지 요소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책임 인정, 유감 표명, 상황 설명, 피해 인정, 재발 방지 약속, 용서 요청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책임 인정'이었다. 실험 참가자의 81.3%가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오히려 상처를 더 키운다고 응답했다. '실수가 있었습니다'처럼 주어가 없는 사과,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죄송합니다'처럼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는 얘기다.
연예인의 사과가 유독 논란이 되는 건 이 요소들 중 하나라도 빠지면 대중이 즉각 포착하기 때문이다. 수십만 명의 눈이 동시에 한 문장을 분석한다. 팬덤 심리와 집단 분노가 뒤섞인 온라인 공간에서 '불완전한 사과'는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
흥미로운 건 사과를 받아들이는 쪽의 심리다. 에버렛 워딩턴 미국 버지니아커먼웰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40년간 용서의 심리를 연구해왔다. 그는 용서가 도덕적 미덕이기 이전에 용서하는 사람의 건강을 지키는 행위임을 강조한다. 용서하지 못한 상태를 유지할 때 코르티솔 수치가 평균 28% 높게 유지된다는 사실이 그의 연구에서 확인됐다.
반대로 진심으로 용서를 경험한 직후에는 뇌의 전측 대상회(anterior cingulate cortex)가 활성화되며 긍정적 감정 처리가 급격히 늘어난다. 쉽게 말해,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뇌와 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이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압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워딩턴 교수는 '용서(forgiveness)'와 '화해(reconciliation)'를 명확히 구분한다. 용서는 내 마음속에서 분노를 내려놓는 내적 과정이지만, 화해는 관계를 다시 맺기로 결정하는 별개의 선택이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마음에서 분노를 놓아줄 수 있고, 사과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반드시 관계를 회복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진짜 사과'와 '가짜 사과'를 구별할 수 있을까. 심리학자들은 몇 가지 신호를 살피라고 조언한다. 사과 후 상대가 변명을 덧붙이는지, '하지만'이라는 접속사가 등장하는지, 피해자의 감정보다 자신의 해명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지를 보면 된다. 이 신호들이 나타날수록 진정성보다 자기보호 욕구가 앞선 사과일 가능성이 높다.
나 자신이 사과할 때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사과의 첫 문장은 단순하다. '내가 잘못했어.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했어.' 이 두 문장이면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오늘 마음속에 오래 걸려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변명 없이 딱 그 두 문장만 먼저 건네보는 건 어떨까. 뇌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그 진심을 알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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