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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공항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순간, 어딘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직장도 없고, 이웃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도시. 그 해방감이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느낌이 우리를 위험에 노출시킨다.
일본 내 한국인 사건·사고 피해자 수가 2022년 348명에서 2025년 3090명으로 3년 사이 약 9배 급증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이미 1784명에 달한다. 긴급여권 발급 건수도 함께 치솟았다. 단순히 여행자 수가 늘었기 때문일까. 심리학자들은 그 이면에 훨씬 흥미로운 인간의 심리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탈억제 효과(disinhibition effect)'로 설명한다. 평소 우리를 조심하게 만드는 사회적 맥락, 즉 직장 동료의 시선, 동네 주민과의 관계, 일상의 루틴이 사라지면 뇌는 경계 수준을 자동으로 낮춘다. 낯선 환경이 주는 자유로움이 동시에 판단력의 이완을 불러오는 셈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아담 갈린스키 교수 연구팀이 2015년 성인 52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평소와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위험 신호에 대한 반응 속도가 평균 23% 느려졌다. 갈린스키 교수는 '새로운 환경은 뇌의 인지 자원을 자극 처리에 집중시켜 위험 탐지 회로의 민감도를 떨어뜨린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더해 여행 중에는 '지금 이 순간만 즐기자'는 현재 편향이 강해진다. 미래의 불편함이나 위험보다 눈앞의 즐거움에 집중하도록 뇌가 세팅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밥을 먹거나, 가방을 열어둔 채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행동들이 여기서 비롯된다.
일본이 특히 문제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인에게 일본은 '낯선 해외'가 아니다. 언어가 일부 통하고, 음식이 익숙하고, 지리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친숙함이 오히려 위험 인식을 낮추는 '익숙함 편향(familiarity bias)'으로 작동한다.
영국 노팅엄대 심리학과 사만다 브라이슨 박사는 2021년 해외여행객 800명을 추적 조사한 연구에서 '주관적 친숙도가 높은 여행지일수록 소매치기와 분실 피해 발생률이 최대 41% 높았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익숙하다고 느낄수록 경계심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한국인 여행객이 도쿄와 오사카에서 유독 피해를 많이 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일본은 실제로도 치안이 좋은 나라지만, 최근 외국인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관광지를 중심으로 소매치기와 절도 범죄가 증가하는 추세다. '일본은 안전해'라는 고정관념이 현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 여행하든, 여럿이 여행하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바로 '사회적 판단 위탁(social judgment delegation)'이다. 낯선 환경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행동 패턴을 따라가거나, 동행자에게 판단을 맡긴다. 내가 직접 상황을 파악하고 결정하는 인지 부담을 줄이려는 심리적 절약 메커니즘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그레고리 왈튼 교수는 '낯선 환경에서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주체적 판단보다 환경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경향이 있으며, 이 순간이 사기나 절도 범죄자들이 노리는 틈새'라고 설명한다. 관광지에서 갑자기 말을 거는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을 낮추는 것도 같은 원리다.
단체 여행에서는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책임 분산 심리도 강해진다.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안도감이 오히려 개인의 주의력을 분산시킨다.
다행히 탈억제 효과와 익숙함 편향은 간단한 인식 전환으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여행 심리학 연구들은 '의식적 환경 재설정(conscious context reset)'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지금 나는 내가 모르는 규칙이 작동하는 곳에 있다'고 스스로에게 짧게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경계 수준이 의미 있게 올라간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숙소 체크인 직후 2분만 투자해 귀중품 위치와 비상 연락처를 다시 확인하고, 관광지에서는 가방 지퍼를 앞으로 메는 단순한 행동이 효과적이다. 즐거운 여행과 안전한 여행은 반드시 반비례하지 않는다. 오늘 일본행 티켓이 있다면, 출발 전 딱 한 번 이렇게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나는 지금 여행지 모드가 아니라, 잠깐 눈을 뜬 사람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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