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아이 울음소리에 새벽 세 시에 눈을 떴다. 예순이 넘은 몸으로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고, 다시 재운다. 내 아이도 아닌데.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할머니 쉬씨는 15년 동안 손녀를 키웠고, 결국 아들을 법정에 세워 7200만 원을 청구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돈 문제처럼 보였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을 다르게 읽는다. 이것은 청구서의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감정의 문제라고.
쉬씨의 사연은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영유아를 돌보는 외가·친가 조부모의 68.4%가 신체적 피로를 호소했고, 이 중 43.1%는 우울 증상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후난성에서는 59세 여성이 아들의 육아를 돕다가 6개월 만에 체중이 20kg 줄고 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사례도 보고됐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돌봄 소진(caregiver burnou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욕구는 뒤로 미루고 타인의 필요를 먼저 채우는 상태가 반복될 때, 감정적·신체적 자원이 고갈되는 현상이다. 문제는 조부모 돌봄의 경우, 이 소진이 더 빠르고 깊게 찾아온다는 점이다.
미국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마슬라크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소진의 핵심 징후로 세 가지를 꼽았다. 정서적 탈진, 비인격화, 성취감 상실이다. 황혼 육아를 하는 조부모에게서 이 세 가지는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고 그는 설명한다.
쉬씨가 법원까지 간 것은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정 욕구(need for recognition)'와 연결해 설명한다. 아담 그랜트 미국 와튼스쿨 조직심리학과 교수는 오랜 연구를 통해, 보상 없이 지속적으로 베푸는 사람은 두 가지 결말을 맞는다고 밝혔다. 지치고 분개하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소모해 가며 계속 주는 것이다. 쉬씨는 전자였다.
특히 '가족이니까 당연히 해야지'라는 인식이 조부모의 희생을 더 깊게 만든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비가시적 노동(invisible labor)'이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노동.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쉬씨에게 아들이 건넨 감사 한마디가 얼마나 됐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대인관계 심리학에서는 '호혜성 원칙(reciprocity principle)'을 중요하게 다룬다. 관계는 주고받음의 균형 위에서 지속된다는 이론이다. 균형이 오래도록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그 관계는 결국 법정이나 단절로 끝나기 쉽다. 쉬씨의 소송은 어쩌면 15년 만에 처음 꺼낸 '나 좀 봐줘'라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들 세대도 나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자기중심 편향(egocentric bias)'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신의 기여는 크게 기억하고, 타인의 기여는 작게 기억하는 인지적 왜곡이다. 부모가 당연하게 돌봄을 제공해 온 세월이 길수록, 자녀는 그 무게를 실제보다 가볍게 느낀다. '엄마가 좋아서 하시는 거잖아'라는 말이 바로 이 편향의 산물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나는 바쁘니까', '엄마는 집에 있으니까'라는 논리로 돌봄이 조부모에게 넘어가는 일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조부모가 느끼는 상실감, 즉 자신의 노후 계획이 사라지는 느낌, 자유가 줄어드는 느낌은 좀처럼 대화로 다뤄지지 않는다.
쉬씨의 소송 결과는 법원의 조정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진짜 해결은 법정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심리상담 전문가들은 황혼 육아를 하는 부모에게 정기적인 '역할 협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얼마나 도울 것인지, 어느 순간 경계를 그을 것인지, 충분한 감사와 보상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가족이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고 있다면, 잠깐 전화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힘드시죠, 정말 감사해요'라는 한마디가 15년의 피로를 다 씻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말이 없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관계를 만들어 줄 것이다. 인정받는다는 느낌, 그것이 어쩌면 쉬씨가 진짜로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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