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 먹이고 265명 성폭행"…피해자들은 왜 그토록 오래 침묵했을까
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수면제 먹이고 265명 성폭행"…피해자들은 왜 그토록 오래 침묵했을까


분명히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믿었던 사람이었고, 존경받는 권위자였고, 조직 전체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 주치의 래리 나사르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한 265명의 선수들 이야기다.


2016년 전 체조선수 레이철 덴홀랜더가 처음 공개 폭로하기까지, 일부 피해자들은 20년 넘게 침묵을 지켰다. 2015년 첫 신고조차 체조협회에 의해 조용히 묻혀버렸다. 왜 피해자들은 그토록 오래, 그렇게 깊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까.



트라우마 유대: 가해자와 피해자를 묶는 심리적 족쇄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트라우마 본딩(Trauma Bonding)'이라고 부른다. 위협과 보살핌이 반복적으로 교차될 때, 피해자의 뇌는 가해자에게 강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한다. 나사르는 치료사이자 의사였다.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의료 처치'라는 이름 아래 포장돼 있었고, 선수들은 그 경계를 스스로 그어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제니퍼 프레이드 미국 오리건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배신 트라우마 이론(Betrayal Trauma Theory)'으로 설명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생존이나 소속감을 의존할 때, 뇌는 배신 사실 자체를 의식에서 억압해버린다는 것이다. 선수 생활 전체가 주치의의 손에 달려 있었던 어린 체조선수들에게 이 메커니즘은 더욱 강력하게 작동했다.


실제로 프레이드 교수 연구팀이 2019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의존 관계가 형성된 가해자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폭로하기까지 평균 3.6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직의 침묵: 기관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방식


나사르 사건에서 더 충격적인 것은 개인의 침묵이 아니라 조직의 침묵이다. 2015년 니콜스가 체조협회에 최초 신고했을 때, 협회는 이를 묻어버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기관 배신(Institutional Betrayal)'이라고 부른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조직이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피해자가 입는 심리적 손상은 배가된다.


캐럴라인 키슬러 미국 위스콘신대 심리학과 부교수 연구팀은 2022년 성인 여성 8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기관 배신을 경험한 피해자의 74.3%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을 보인 반면, 기관의 지지를 받은 피해자는 그 비율이 38.1%에 그쳤다고 밝혔다. 조직이 침묵을 강요할 때,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두 배 가까이 깊어지는 셈이다.


나사르 사건에서 미국 체조협회, 미시간주립대, 미국올림픽위원회는 모두 수년간 신고를 묵살하거나 은폐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것은 단지 개인의 두려움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그들의 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 복종: '선생님이니까 맞겠지'라는 심리적 함정


사회심리학의 고전인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권위자에 대한 복종이 인간 심리의 기본값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사르는 국가대표 주치의였다. 어린 선수들은 물론 그 부모들까지, '의사 선생님이 하는 치료'라는 프레임 앞에서 자신의 불편한 감각을 억눌렀다. '내가 이상한 건지도 몰라'라는 자기 의심이 폭로의 용기를 잠식했다.


특히 엘리트 스포츠 환경은 이 복종 심리를 극단까지 끌어올린다. 코치, 감독, 의료진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훈련이 수년간 반복된다. 통증을 참고, 의심을 거두고, 오직 성과에 집중하도록 조건화된 선수들에게 '이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선수 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일이기도 했다.


엘리트 스포츠 내 권위 구조와 심리적 취약성을 연구해 온 마크 피터슨 영국 레스터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는 '엘리트 선수일수록 조직 위계에 대한 복종 성향이 강하게 내면화돼 있으며, 이는 성폭력 피해 신고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침묵을 깨는 것: 한 명의 용기가 265명을 움직인 이유


265명의 침묵을 깬 것은 결국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2016년 레이철 덴홀랜더가 처음으로 공개 폭로하자, 이후 수십 명이 연달아 증언에 나섰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증거 효과(Social Proof Effect)'로 설명한다.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낼 때, 침묵하던 다른 사람들이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구나'라는 안도감과 함께 목소리를 낼 용기를 얻는다.


나사르 사건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 트라우마 본딩, 기관 배신, 그리고 오랜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가 겹겹이 작동한 결과다. 만약 우리 주변에 오랫동안 말 못 할 무언가를 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이렇게 물어봐 주는 건 어떨까. '괜찮아? 말하고 싶으면 언제든 들을게.' 그 한마디가 265번째 침묵을 깨는 첫 번째 말이 될 수 있다.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13022
  • 기사등록 2026-09-15 08:52:4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