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태움‘ 또 터졌다…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폭력의 사슬‘, 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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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태움' 또 터졌다…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폭력의 사슬', 끊을 수 있을까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병원 '태움' 또 터졌다…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폭력의 사슬', 끊을 수 있을까


신규 간호사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사람들이 있다. 고성과 욕설, 따돌림이 일상이었고, '이 악물고 버텨야 한다'는 말이 유일한 위로였다. 그렇게 버텨낸 사람이 어느새 후배 앞에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M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9년차 간호사 김주희 씨는 신규 간호사 시절부터 고성과 욕설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이른바 '태움'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6년이 지났지만, 병원 현장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하다. 법은 있는데 왜 태움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태움이 멈추지 않는 이유: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야 한다'는 뒤틀린 논리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폭력의 대물림(cycle of abuse)'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학대나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가 시간이 지나 권력을 갖게 됐을 때, 자신이 받은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약자를 대하게 되는 패턴이다. 나쁜 경험이 나쁜 행동을 정당화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셈이다.


마틴 테이처 미국 하버드대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만성적인 직장 내 괴롭힘에 노출된 개인은 뇌의 전전두엽 기능이 저하되어 감정 조절 능력과 공감 능력이 함께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오래 괴롭힘을 당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신경학적 변화가 실제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여기에 '정상화 편향(normalcy bias)'이 더해진다. '원래 다 이렇게 배웠다', '나도 그렇게 배워서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반복되면, 폭력적인 문화가 조직 내에서 당연한 관행으로 굳어진다. 태움이 수십 년간 의료계에서 지속돼온 배경에는 바로 이 집단적 정상화 편향이 자리하고 있다.



법이 있어도 신고 못 하는 이유: '심리적 안전감'이 없는 조직의 민낯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지만, 의료 현장에서 실효성은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에이미 에드먼슨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확보되지 않은 조직에서는 구성원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폭로의 용기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병원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20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간호사의 68.3%가 공식 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고하지 않은 이유 1위는 '보복이 두려워서'(41.2%)였고, '신고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33.7%)가 뒤를 이었다. 가해자가 대부분 자신의 직속 상급자거나 조직 내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는 현실이 피해자의 입을 막는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이를 '권력 거리(power distance)'가 높은 조직 문화의 전형적인 문제로 설명한다. 위계가 강하고 상급자에 대한 복종이 당연시되는 환경에서는, 잘못된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위 자체가 조직 이탈로 해석된다. 피해자는 고통을 참거나, 조직을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구조에 갇힌다.



태움의 심리적 상처: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태움의 후유증은 단순한 스트레스 수준을 훌쩍 넘는다. 크리스티나 마슬라흐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개발한 번아웃 척도를 적용한 국내 연구에 따르면, 태움 피해 경험이 있는 간호사의 번아웃 수준은 비경험자보다 평균 2.4배 높았다. 정서적 고갈, 비인격화, 성취감 저하가 함께 나타나는 전형적인 번아웃 패턴이다.


더 심각한 것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지는 경우다. 직장 내 만성적 괴롭힘은 단회성 충격과 달리, 매일 반복되는 예측 불가능한 위협으로 신경계를 지속적으로 자극한다. 뇌가 항상 '경계 모드'에 놓이면서 수면 장애, 우울, 불안이 복합적으로 발생하고, 결국 이직이나 이탈로 이어진다. 한국간호사협회에 따르면 국내 신규 간호사의 평균 이직률은 45.5%에 달한다.


고통의 연쇄가 멈추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은 '트라우마 유대(trauma bonding)'를 통해 그 조직과 문화에 동일시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다음 세대에 같은 상처를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피해자가 곧 가해자가 되는 비극적인 순환이다.



폭력의 사슬을 끊으려면: 개인의 의지가 아닌 시스템의 변화


전문가들은 태움 근절이 개인의 인성이나 의지 문제가 아닌, 조직 구조와 문화의 문제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피해자에게 '더 용감하게 신고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실질적인 익명 신고 시스템, 신고자 보호 조치, 독립적인 조사 기구가 갖춰져야만 법이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다.


동시에 '자기자비(self-compassion)' 훈련과 같은 심리 교육을 조직 내에 도입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크리스틴 네프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 교육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자기자비 수준이 높은 리더일수록 부하 직원에게 공감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는 경향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스스로의 고통에 친절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도 친절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혹시 지금 직장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면, 혼자 참지 말았으면 한다. 고용노동부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센터(1350)에 익명으로 상담을 요청할 수 있다. 당신이 겪는 것은 당연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분명히 멈춰야 할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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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9-17 08: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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