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태권도 국가대표 이준석 선수가 2026 세계선수권 결승을 앞두고 한 말이 화제가 됐다. "메달 없는 미래가 너무 무서웠다." 이 한 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멈칫했다. 세계 정상을 다투는 선수가 느끼는 두려움이 이렇게 클 수 있을까?
사실 이 불안은 이준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운동을 삶의 전부로 키워온 수많은 엘리트 선수들이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속으로는 같은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공포는 심리학적으로 이름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운동선수 정체성 과잉몰입(Athletic Identity Foreclosure)'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모든 자아를 선수라는 역할 하나에 걸어버리는 상태다. 브리트 스미스 미국 미시간주립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가 2019년 청소년 엘리트 선수 74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운동선수 정체성이 강할수록 커리어 위기 시 불안과 우울 점수가 최대 2.4배 높게 나타났다.
이준석 선수의 발언처럼 '메달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는 생각은 과장된 비관이 아니다. 심리학 용어로 말하면 '인지적 융합(Cognitive Fusion)'에 가깝다. 즉, '나는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생각과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하나로 엉켜버린 상태다. 이 상태에서 실패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자아의 붕괴처럼 느껴진다.
어린 나이부터 운동 하나만 보고 달려온 엘리트 선수들에게 이 현상은 특히 두드러진다. 이준석 선수 역시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경기장에 오면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고 했다. 외부의 기대가 내면의 두려움으로 굳어지는 과정, 그게 바로 스포츠 심리학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이준석 선수는 "부모님이 오시면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아서 어릴 때부터 부모님 오는 걸 안 좋아했다"고 털어놨다. 이 고백은 심리학에서 잘 알려진 '사회적 평가 불안(Social Evaluation Anxiety)'의 전형적인 사례다. 로버트 와인버그 미국 마이애미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선수들은 낯선 관중보다 가족과 코치 앞에서 실수했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 평균 37% 더 강하다.
이는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s)' 이론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에 가장 취약하다. 낯선 관중 앞에서의 실수는 '그냥 한 번 졌다'로 끝나지만, 부모 앞에서의 실수는 '나라는 사람 전체를 들킨 것 같다'는 감각으로 남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족의 응원이 오히려 선수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시킬까봐 두려운 마음도 함께 커지기 때문이다. '하던 대로 하면 승산 있다'는 이준석의 결승 전 다짐은 바로 이 불안을 스스로 달래는 심리적 루틴이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준석 선수가 그 무서움을 숨기지 않고 경기에 임했다는 것이다. 스포츠심리학에서는 불안을 무조건 없애야 할 적으로 보지 않는다. 아이버 하니 영국 버밍엄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가 제안한 '불안 방향 이론(Anxiety Direction Theory)'에 따르면, 같은 불안도 '촉진적(Facilitative)'으로 해석하는 선수는 그렇지 않은 선수보다 경기력이 평균 22.6% 높게 나타났다.
차이는 간단하다. '무서워서 못하겠다'가 아니라 '무서우니까 집중하겠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준석의 '메달 없는 미래가 무서웠다'는 발언은, 그 두려움이 그를 훈련장으로 이끈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준다. 공포는 회피 대상이 아니라 활용 가능한 에너지였던 것이다.
물론 이런 전환이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스포츠 심리 상담 현장에서는 선수들이 자신의 불안을 직접 언어화하고, 그것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훈련을 반복한다. 이준석 선수가 자신의 두려움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미 그 과정을 어느 정도 거쳤다는 신호일 수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운동선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승진을 앞둔 30대, 은퇴를 앞에 둔 50대 모두 '내가 지금 하는 이것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한다. 정체성을 단 하나의 역할에 걸어두는 순간, 그 역할의 상실은 곧 나의 상실이 된다.
심리학자들은 이에 대한 처방으로 '다중 자아 확장(Multiple Self-Expansion)'을 제안한다. 선수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취미를 가진 사람이기도 한 '여러 겹의 나'를 의도적으로 키우는 것이다. 어느 하나가 흔들려도 다른 정체성이 나를 붙들어줄 수 있도록.
오늘 문득 '이것 말고는 내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건 위험 신호다. 작은 것이라도 좋다. 그냥 좋아서 하는 무언가, 결과와 상관없이 나를 표현하는 무언가를 하나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메달 없는 미래'도 결국 '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몸이 기억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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