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성실하게 살아온 남편이었다. 직장 생활 수십 년, 가정도 소홀히 한 적 없었다. 그런데 퇴직 이후 조금씩 이상해지더니, 어느 날 온라인에서 만난 낯선 여성에게 전 재산을 날렸다. 아내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며 무너졌다.
최근 법률 매체에 소개된 한 사례다. 경증 치매 진단을 받은 남편이 로맨스 스캠에 걸려 재산을 탕진했고, 아내는 이혼과 재산분할 소송까지 고려하게 됐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기 피해가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노년기의 뇌 변화와 사기꾼의 치밀한 심리 조종이 맞물린 필연적 결과에 가깝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 신경과학과 데이비드 이글먼 연구팀의 연구에 따르면, 60대 이후 뇌의 전두엽 기능이 서서히 저하되면서 '회의적 판단력'이 눈에 띄게 약해진다. 전두엽은 충동을 억제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다. 이곳이 흔들리면, 달콤한 말에 '이상하다'는 신호가 작동하지 않는다.
경증 치매는 이 문제를 더 심화시킨다. 기억력보다 판단력이 먼저 손상되는 경우가 많아,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진 교수는 '경증 치매 환자는 상대방이 보내는 애정 신호에 대한 경계심이 현저히 낮아지고, 오히려 감정적 유대감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가족들이 이를 모른다는 점이다.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고,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남편이 온라인에서는 전혀 다른 세계에 빠져 있었다. '설마 우리 아버지가, 우리 남편이…'라는 안도감이 오히려 피해를 키웠다.
로맨스 스캠은 단순한 금전 사기가 아니다. 심리학 용어로 '러브 바밍(Love Bombing)'이라 불리는 과도한 애정 폭격으로 시작한다.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관심과 칭찬을 쏟아부어, 상대방이 '이 사람만큼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퇴직 후 사회적 역할을 잃고, 존재감이 흐려진 노년 남성일수록 이 공략에 더욱 취약하다.
미국 FBI 인터넷범죄신고센터(IC3)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로맨스 스캠 피해자의 절반 이상이 60세 이상 노년층이었으며, 피해 금액 중앙값은 다른 연령대보다 약 3배 높았다. 국내에서도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로맨스 스캠 신고 건수는 전년 대비 41% 증가했다. 피해자 상당수가 '처음에는 사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사기꾼들은 피해자가 의심하려는 순간 '당신만 믿는다', '우리 사이를 왜 의심하냐'며 감정적 죄책감을 유발한다. 이 순간 피해자는 의심 대신 사과를 선택하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스라이팅'과 유사한 감정 조종 기제로 분류한다.
가족의 피해를 키운 또 하나의 심리가 있다. 바로 '낙관 편향(Optimism Bias)'이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인지신경과학과 탈리 샤롯 교수 연구팀은 인간이 부정적인 사건이 '나 혹은 내 가족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음을 밝혔다. 연구팀이 성인 남녀 수백 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80% 이상이 평균보다 자신이 사기 피해를 당할 확률이 낮다고 응답했다.
이 편향은 가족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아버지는 꼼꼼한 분이니까', '남편이 이 나이에 온라인 사기를 당할 리 없어'라는 생각이 조기 발견을 막는 것이다.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때, 가장 마지막에 알아채는 사람이 가족인 이유가 여기 있다.
전문가들은 노년의 가족이 온라인에서 새로운 지인을 사귀거나 갑자기 돈 이야기를 꺼내면 즉시 대화를 나눠볼 것을 권한다. 비난이 아니라 진심 어린 관심에서 시작된 대화가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거창한 예방책이 필요한 게 아니다. 부모님과 함께 앉아 스마트폰 속 메시지를 한 번 들여다보는 것, '요즘 온라인에서 연락하는 사람 있어요?'라고 가볍게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작이 된다. 중요한 건 감시가 아니라 연결이다. 부모님이 디지털 세상 속에서 외롭지 않도록, 가족이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사기꾼들은 늘 고독한 틈을 파고든다. 가족이 그 틈을 먼저 채운다면, 낯선 누군가가 들어설 자리는 좁아진다. 문득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긴 대화를 나눈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 전화 한 통을 먼저 드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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