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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내가 분명히 잘못한 게 없는데,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하고 있다. 그 순간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무엇일까. 억울함이다. 태국 배드민턴 스타 피차몬 차이반이 딱 그 상황에 놓여 있다.
최근 금지약물 양성 반응 판정을 받은 피차몬은 '연고를 발랐을 뿐'이라며 항변하고 있다. 도핑 위반 선수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정작 본인은 의도적인 복용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처럼 '억울하다'는 감각이 우리 뇌와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심리학은 꽤 오래전부터 추적해왔다.
억울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도덕적 감정(moral emotion)'의 하나로 분류한다. 조너선 하이트 미국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는 도덕적 감정이란 나 자신의 이익과 직접 관계가 없는 상황에서도 발동하는 강렬한 반응이라고 설명한다. 억울함은 그 중에서도 자신이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인식될 때 터져 나오는 가장 격렬한 형태다.
뇌 연구는 더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2008년 에른스트 페르 스위스 취리히대 경제학과 교수 연구팀이 성인 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낀 피험자들의 뇌 편도체와 전두엽 피질이 동시에 강하게 활성화됐다. 편도체는 공포와 분노를 처리하는 부위다. 즉, 억울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뇌는 실제 위협을 당한 것과 비슷한 경보를 울린다.
더 흥미로운 점은 억울함이 기억에 각인되는 방식이다. 불공정한 경험은 중립적 경험보다 훨씬 선명하게, 그리고 오래 기억된다. 이를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부른다. 진화적으로 위험 신호를 더 철저히 기억해야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억울함이 쉽게 잊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피차몬의 사례에서 심리학적으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낙인(stigma)'이다. 어빙 고프만 미국 사회학자는 낙인이란 개인의 실제 정체성을 단 하나의 부정적 속성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도핑 선수'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 그 사람의 수년간 노력과 성취는 모두 지워지고 오직 그 하나의 오점만 남는다.
스포츠 심리학자 샌디 고든 호주 서호주대 스포츠과학학과 교수는 2019년 연구에서 도핑 의혹을 받은 선수들이 평균적으로 임상적 우울증 수준의 심리 증상을 경험한다고 발표했다. 특히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위반일수록 자아 정체성 혼란과 무력감이 더 극심하게 나타났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죄인이 됐다'는 상황은 인간이 버티기 가장 어려운 심리적 조건 중 하나다.
여기에 '도덕적 오염(moral contagion)' 심리도 작용한다. 한번 부정적 딱지가 붙은 대상은 주변 것들까지 오염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심리적 현상이다. 피차몬의 과거 메달과 업적조차 '혹시 그때도?'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재검토되는 것이 바로 그 예다.
그렇다면 억울한 상황에서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니엘 길버트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간에게는 '심리적 면역 시스템(psychological immune system)'이 있다고 설명한다. 극도로 힘든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보호하고 의미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길버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억울한 경험을 한 사람 중 약 68%가 6개월 이내에 '이 경험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긍정적 재해석에 도달했다.
핵심은 자기 서사(self-narrative)를 지키는 것이다. 외부에서 '약쟁이'라는 이야기를 덮어씌우려 할 때, 스스로 '나는 규칙을 지키며 싸워온 선수다'라는 내면의 서사를 놓치지 않는 것이 심리적 붕괴를 막는 방어막이 된다. 이때 주변의 신뢰할 수 있는 사람 한두 명과 솔직하게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심리적 면역 시스템의 회복 속도를 크게 높인다.
우리도 일상에서 억울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오해받았을 때, 공정하지 않은 평가를 받았을 때다. 그 감정을 억지로 누르거나 혼자 삼키기보다, '내가 억울하다고 느끼는 이유'를 글로 써보는 것도 방법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라고 부르며, 부정적 감정을 외부화해 처리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가 있다고 본다.
피차몬의 B샘플 분석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세상의 시선은 가혹하다. 하지만 심리학이 반복적으로 확인한 사실이 있다. 억울한 상황에서 사람을 가장 빠르게 회복시키는 것은 화려한 해명도, 언론의 정정 보도도 아니라는 점이다. 믿어주는 단 한 명의 존재가 그 역할을 한다.
억울함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가 주변에 있다면, 먼저 판단을 내리기 전에 '네 말을 듣고 싶어'라고 말을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그 한마디가, 억울함의 불길로 타오르는 뇌를 식히는 가장 빠른 소화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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