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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학교 수업이 끝나면 우르르 몰려가던 문구점 앞. 100원짜리 뽑기 기계 앞에서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을 기억하는가. 오락실 격투 게임 앞에서 처음으로 모르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던 기억, 분식집 구석 자리에서 선생님 흉을 보던 오후 네 시의 낄낄거림도.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요즘 아이들에게 '방과 후 아지트'를 물어보면 대답이 한참 뜸해진다. 학교 앞 문구점과 오락실이 하나씩 사라진 자리에, 10대들만의 공간도 함께 지워지고 있다.
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1989년 저서 '훌륭한 공간(The Great Good Place)'에서 '제3의 공간(Third Place)'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가정이라는 제1의 공간, 직장·학교라는 제2의 공간 외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고 관계를 맺는 비공식적 장소가 인간 발달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오락실, 문구점, 동네 분식집은 10대에게 그 제3의 공간이었다.
제3의 공간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성이 있다. 평등한 분위기, 낮은 진입 장벽, 단골 관계에서 비롯된 소속감이 그것이다. 100원으로도 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성적이나 집안 형편 없이 그냥 '거기 있는 아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그 공간에서 처음으로 또래 사회의 규칙을 몸으로 익혔다.
존스홉킨스대 블룸버그 공중보건대학원의 에이미 가너 박사는 2022년 청소년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비공식적 모임 공간에 정기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청소년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사회적 유능감 점수가 31.4%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어디선가 아무 이유 없이 어울릴 수 있다는 것, 그 단순한 경험이 사회성의 토대가 되는 셈이다.
심리학에서는 청소년기를 '자아 정체성 형성의 결정적 시기'로 본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 시기에 아이들이 다양한 역할과 관계를 실험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탐색한다고 설명했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제도적 공간에서는 이 실험이 제한된다. 선생님에게 평가받고, 부모에게 감시받는 구조 안에서는 가면을 내려놓기 어렵다.
하지만 문구점 앞 평상이나 오락실 구석은 달랐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처음으로 어른의 시선 없이 갈등을 해결하고, 타협하고, 배신당하고, 화해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비공식적 또래 사회화(informal peer socialization)'가 일어나는 공간이었다. 집단 내 서열을 경험하고, 아웃사이더의 감정을 배우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모두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압축되어 있었다.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발달심리학과 데버라 리드아네트 교수 연구팀이 2021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방과 후 비구조화된 또래 집단 활동을 주 3회 이상 경험한 청소년은 성인이 된 후 직장 내 갈등 해결 능력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학원 일정으로 빼곡한 하루 속에서 그 '비구조화된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최근 국내 한 연구팀이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중고등학교를 다닌 성인들의 구술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응답자의 89.3%가 학교 근처의 특정 비공식 공간을 또래 관계 형성의 핵심 장소로 꼽았다. 반면 2020년 이후 청소년을 자녀로 둔 부모들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아이가 방과 후 자주 가는 아지트 같은 곳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22.1%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이를 '공간 빈곤(spatial pover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의 부재가 청소년의 심리적 발달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상업화된 카페나 스터디카페는 소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진정한 제3의 공간이 되기 어렵다. 스마트폰 속 온라인 공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가상 공간이 물리적 공간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고려대 심리학과 허지원 교수는 온라인 또래 교류가 오프라인 상호작용에 비해 공감 정확도와 비언어적 신호 해독 능력을 충분히 훈련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여러 연구에서 지적한 바 있다. 화면 너머로는 상대가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문구점과 오락실이 있던 시절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 공간에서 따돌림이 생기고, 위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심리학은 그 불완전한 경험 자체가 성장의 재료임을 말한다.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설프게 부딪히고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정서 조절 능력과 회복탄력성을 키운다.
부모로서, 또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아이의 방과 후 시간표를 학원으로만 채우는 대신, 의도적으로 '아무 목적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동네 도서관의 자유 열람실, 아파트 단지 안 작은 광장, 학교 앞 작은 공원 벤치라도 좋다. 오늘 아이에게 '방과 후에 친구들이랑 어디서 놀아?'라고 물어보는 것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그 질문 안에, 어른이 되는 연습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려는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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