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신고했다. 또 신고했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주에서 헤어진 연인에게 살해된 40대 여성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스토킹과 성폭력, 교제폭력으로 무려 네 차례 신고를 했지만 사건은 매번 종결됐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봤지만 끝내 참극을 막지 못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접한 많은 이들이 묻는다. '왜 피해자는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심리학은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폭력과 시스템의 무응답 속에서 인간의 뇌는 스스로 저항을 포기하도록 학습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학습된 무력감'이라 부른다.
학습된 무력감은 1967년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반복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노출된 존재는 실제로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셀리그만 교수의 실험에서 전기 충격을 피할 방법이 없었던 개들은, 나중에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냥 드러누워 고통을 감내했다.
교제폭력 피해자의 심리도 이와 동일한 경로를 밟는다. 신고해도 달라지지 않고, 도망쳐도 찾아오고, 주변에 알려도 '그냥 헤어지면 되지 않냐'는 말만 돌아오는 상황이 반복되면 뇌는 '내가 무엇을 해도 결과는 같다'고 결론 내린다. 이 순간부터 생존 본능조차 마비되기 시작한다.
2022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가정폭력·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교제폭력 피해 경험자 중 외부 기관에 도움을 요청한 비율은 18.3%에 불과했다. 82%에 가까운 피해자가 신고조차 하지 않은 이유 중 가장 많은 답변은 '신고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였다. 학습된 무력감이 이미 광범위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피해자의 심리만큼 중요한 것이 가해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일이다. 스토킹 가해자 상당수는 이른바 '집착형 애착'을 보인다. 영국 심리학자 존 볼비가 정립한 애착이론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상대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자아의 붕괴로 인식하는 심리 상태다. 이별은 단순한 관계 종료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으로 느끼기 때문에 극단적인 집착과 통제로 이어진다.
레온 살라메흐 미국 캘리포니아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2020년 스토킹 가해자 240명을 분석한 결과, 그 중 71%가 이별 통보 직후 증상이 급격히 악화됐다. 특히 헤어진 직후 3개월이 가장 위험한 시기로, 가해자의 뇌에서는 거절 신호가 물리적 고통과 동일한 신경 경로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절의 고통'이 문자 그대로 뇌에서 신체적 통증처럼 처리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고통이 분노와 결합될 때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애적 손상'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인식이 상대에 대한 응징 욕구를 정당화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내가 이렇게 힘든 건 네 탓이니,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왜곡된 논리가 폭력의 동력이 된다.
이번 제주 사건에서 가장 뼈아픈 부분은 피해자가 네 차례나 신고를 했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듭 외면당한 경험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 뇌의 신뢰 회로 자체를 손상시킨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23년 교제폭력 피해 생존자 15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신고 후 사건이 종결된 경험을 한 피해자의 89%가 '이후 다시는 신고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경험이 '사회적 학습된 무력감'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개인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학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굳어진다. 고립감과 절망감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임상심리 전문가들은 이 상태에서 피해자가 역설적으로 가해자에게 더 의존하게 되는 '트라우마 본딩'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스토킹처벌법이 2021년 시행됐지만 현장의 체감은 여전히 낮다. 법원행정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스토킹 범죄로 접수된 사건 중 실제 구속으로 이어진 비율은 12.4%에 불과했다. 법이 있어도 작동하지 않을 때, 피해자의 신뢰와 생존 의지는 함께 무너진다.
학습된 무력감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기가 극도로 어렵다.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뇌의 명령이 입을 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주변인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강조한다. 피해자가 직접 말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사소한 신호에도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나 동료가 특정 연락처를 받으면 움찔하거나, 외출을 갑자기 꺼리거나, 몸에 설명되지 않는 멍이 생겼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자. '요즘 어때? 혹시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라는 한 마디가 학습된 무력감의 고리를 끊는 첫 번째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누군가의 용기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당신의 관심 한 번이 그 시작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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