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경기장 한복판에서 인종차별적 구호가 쏟아졌다. 상대 감독은 경기를 멈출 필요를 못 느낀다고 했다. 피해를 입은 선수는 한국인 윙어 엄지성이었다. 2026년 10월, 영국 챔피언십 리그 스완지시티와 밀월의 경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왜 우리는 이 뉴스를 접하는 순간 억울함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는 걸까. 심리학은 이 장면 안에서 꽤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인종차별적 언어는 단순한 무례함이 아니다. 클로드 스틸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 이론을 통해, 차별적 시선에 노출된 사람은 즉각적으로 인지 능력과 수행 능력이 저하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95년 연구에서 흑인 대학생들이 인종 관련 부정적 고정관념을 상기시키는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수행 점수가 평균 11.8점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중 인종차별 구호를 들은 선수의 뇌는 이 순간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 공을 쫓으면서도 위협적인 사회적 신호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분비되면서 집중력은 흐트러진다. 선수에게 '그냥 무시하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은, 뇌의 작동 원리를 전혀 모르는 소리인 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속성이다. 나오미 즈크 미국 미시간대 사회심리학과 교수의 2020년 연구에 따르면, 인종차별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의 72%가 이후 수일간 반추(rumination), 즉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재생하는 현상을 경험했다. 한 번 노출된 차별의 상처는 경기가 끝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밀월 감독이 경기 중단을 거부한 것은 단순한 몰상식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권위 있는 방관자'가 침묵으로 차별을 승인하는 구조다. 1968년 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가 정립한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는 책임이 분산될수록 개인이 개입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기장에 수천 명이 있었고, 책임 있는 위치의 어른은 멈추지 않았다.
더 나아가 권위자의 반응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 기준이 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사회적 교정(social norming)'이라고 부른다. 감독이 경기를 멈추지 않는 행동은 구경꾼들에게 '이 정도는 괜찮다'는 암묵적 신호로 작동한다. 영국 스카이스포츠와 다수의 현지 매체가 이번 사건에 분노한 배경에는 이러한 규범의 붕괴에 대한 집단적 반응이 담겨 있다.
반면 피해자인 엄지성 선수 입장에서는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고립감이 누적된다.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의 부재는 차별 피해의 심리적 타격을 두 배 이상 키운다는 연구도 있다. 조직이나 권위자가 명확하게 개입할 때 피해자의 회복 탄력성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뉴스를 접한 수많은 사람이 화가 났다. 직접 경기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조나단 하이트 미국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는 이를 '도덕적 의분(moral outrage)'으로 설명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부당하게 다루어질 때 인간은 직접 피해를 입은 것처럼 감정적으로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분노는 결코 쓸모없는 감정이 아니다.
하이트 교수의 2012년 연구에서는 도덕적 의분을 경험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사회적 규범 위반에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변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3.4배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가 이 뉴스에 분노하는 것, 그리고 SNS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사실 집단의 도덕 경계를 지키려는 본능적 반응이기도 하다.
다만 분노가 '옳은 감정'이라는 것과, 그 분노를 '잘 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온라인의 분노가 실제 제도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피해자에게는 공허한 위로에 그칠 수 있다. 분노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심리학은 차별 피해의 회복에 있어 '목격자의 개입'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대니얼 우드릭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차별 장면에서 제3자가 명확하게 '그건 잘못됐다'고 발언했을 때 피해자가 경험하는 심리적 충격이 최대 49% 감소했다.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피해자의 뇌는 다르게 반응한다.
현장에 없더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 사건을 공론화하고, 해당 클럽과 리그에 제도적 대응을 요구하며, 주변에서 비슷한 일을 목격했을 때 침묵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작지만 명확하다. 차별을 보고 모른 척하지 않는 것, 그리고 피해자 곁에 있다는 신호를 보내주는 것. 그 한 마디가 누군가의 뇌에서 코르티솔 대신 옥시토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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