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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외도, 딸의 정체성과 신뢰의 붕괴 - “그날 이후, 딸의 세상은 무너졌다.”
  • 기사등록 2025-05-12 08: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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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권다미 ]



1. 가정이라는 이름의 성역이 무너질 때


가족은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입니다. 특히 딸에게 있어 ‘아빠’란 존재는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 중 하나입니다. 존경과 안정, 보호를 상징하는 그 틀 속에서 아이는 세상을 배우고 관계를 형성해 나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빠’가 외도라는 이름으로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딸은 아빠가 “한 남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존경의 대상’에서 ‘역겨움과 혐오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이 감정은, 단순한 배신감을 넘어서 세상의 남성 전체에 대한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Judith Herman은 그녀의 저서 《Trauma and Recover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트라우마의 핵심은 신뢰의 붕괴이다. 피해자는 세상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며, 모든 인간관계를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딸에게 아빠의 외도는 트라우마입니다. 그 사건은 단순히 가족 내에서의 상처에 그치지 않고, 딸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인식 전체를 흔들어놓습니다.

 

2. 신체 접촉에 대한 거부감, 연애 불가능의 상태


많은 부모는 “아이도 곧 잊어 버리겠지”, “시간이 약이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외도로 인한 충격은 정서적 영역뿐 아니라 신체적 반응으로까지 나타납니다. 한 상담 사례에서는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된 뒤, 손을 잡는 것조차 혐오스럽게 느끼고, 연애 감정 자체를 부정하게 된 딸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라고요? 저는 그렇게 못 느껴요. 다 역겨워요.”


이는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D.W. Winnicott)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이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신뢰’를 경험하며 건강한 애착을 형성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본 신뢰가 무너지면, 신체 접촉 자체가 불쾌한 것으로 변형됩니다. 딸은 자기 안의 ‘애착 시스템’이 붕괴한 채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엄마는 딸에게 기댈 수는 없습니다.


남편 외도로 엄마는 누구보다 힘이 듭니다. 가장 믿고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했고, 누구보다 위로받고 싶습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딸에게 알아달라고 하거나 위로를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순간, 딸은 또 다른 피해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딸에게 “그래도 너희 아빠와 다시 잘 지내보려 한다.” “조금만 이해해 줄 수 없겠니”라고 말하는 순간, 딸은 자신의 상처가 무시당했다고 느끼며, 부모 모두에게서 정서적으로 단절되기 시작합니다.


가족치료의 거장 머리 보 웬(Murray Bowen)은 “가족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개별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엄마와 딸이 각자의 상처를 개별적으로 돌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 딸이 부모의 관계에 개입하게 되는 메커니즘


외도의 여파 속에서 딸이 “엄마, 아빠와 이혼해”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엄마는 “왜 네가 이 문제에 끼어들어?”라며 딸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이때 돌아봐야 할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혹시 내가 너무 많은 얘기를 딸에게 했던 건 아닐까?”


딸이 부모의 관계에 깊이 개입하는 경우, 그 배경에는 엄마가 딸에게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전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이는, 들은 만큼 판단하게 됩니다. 엄마가 매일 같이 아빠를 비난하고, 외도의 경과를 낱낱이 공유했다면, 딸은 심판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리학자 존 가트맨(John Gottman)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자녀에게 배우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순간, 아이는 부모 모두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5. 딸에게 필요한 것: 사과와 복원 과정


부모가 화해를 결심하더라도, 딸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 회복의 절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딸은 그저 말뿐인 화해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이후 아빠는 어떤 각오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진정성 있는 설명과 사과의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딸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제스처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책임을 지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딸의 마음을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며, 상담 치료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6. 이혼이냐, 화해냐, 답은 ‘중심을 잡는 엄마’에 달려 있다.


남편 외도로 엄마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정서적 의존, 경제적 이유 등으로 다시 관계를 복원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을 딸이 해주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딸이 아무리 “이혼해, 엄마”라고 해도, 그건 엄마가 딸에게 지나치게 감정을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결정’이 아니라,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나는 아직 고민 중이다. 하지만 이건 나의 문제고, 너에게 짐 지우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엄마의 태도가 딸에게는 가장 큰 울타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세계가 무너진 아이는, 다시 세상을 믿을 수 있을까? 해답은 부모에게 달려 있습니다. 특히 엄마가 자신의 상처를 딸의 위로로 덮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회복해 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딸은 비로소 믿음이라는 언어를 다시 배우게 됩니다. 이 글은, 외도라는 사건보다 그 이후의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빠가 다시 아빠로 돌아오고, 엄마가 다시 엄마로서 자녀의 울타리가 되기 위해, 가족은 단단한 반성과 정직한 소통, 그리고 책임 있는 태도를 함께 배워야 합니다.

 

참고문헌

Judith Herman. Trauma and Recovery. Basic Books, 1992.

Donald Winnicott. Playing and Reality, Routledge, 1971.

John Gottman. Raising an Emotionally Intelligent Child, Simon & Schuster, 1997.

Murray Bowen.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Jason Aronson,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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