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원
[한국심리학신문=배정원 ]
“항우울제는 복불복이에요.”
정신과 치료를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누군가는 첫 약에서 효과를 보지만, 누군가는 몇 번의 실패와 부작용을 겪은 뒤에야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는다. 이처럼 정신과 약물은 아직도 시행착오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발달은 이제 ‘맞는 약을 찾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유전정보가 있다.
(출처:프리픽)
나의 유전자는 어떤 항우울제를 선택할까?
약물유전체학(pharmacogenomics)은 개인의 유전정보에 따라 약물 대사 속도와 반응을 예측하는 생명과학의 한 분야다. 특히 CYP450 효소군(CYP2D6, CYP2C19 등)은 항우울제 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효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따라 어떤 사람은 약이 빠르게 분해되고, 어떤 사람은 체내에 오랫동안 남아 부작용을 유발한다.
유전자 기반 맞춤형 항우울제 치료, 실제 임상에서 입증되다
2023년 Nature에 게재된 Greden 박사 연구팀의 대규모 임상 결과에 따르면, 환자의 유전정보를 고려해 약을 선택한 그룹은 기존 치료 방식보다 더 빠른 증상 완화와 적은 부작용을 보였다.
(출처:프리픽)
이 연구는 특정 유전자형을 가진 사람들이 SSRI보다 SNRI 계열의 약물에 더 잘 반응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즉, 유전자 분석만으로도 약물 반응 예측이 가능하다는 걸 실증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국내 연구에서도 확인된 개인 맞춤형 치료 효과
우리나라에서도 유전자 기반 치료법의 유효성이 드러나고 있다. 부천성모병원 배치운 교수와 고려대학교 한창수 교수 연구팀은 주요우울장애(MDD) 환자 100명을 대상으로 유전자 분석 기반 항우울제 처방 임상을 진행했다.
이 연구에서는 ‘뉴로파마젠(Neuropharmagen)’이라는 유전정보 분석 도구를 활용해 각 환자에게 적합한 항우울제를 선정했고, 그 결과 기존의 경험 중심 약물 선택 방식보다 우울 증상 개선이 빠르고 부작용도 덜했다.
특히 해밀턴 우울 척도(HAMD-17)와 부작용 평가 항목(FIBSER) 점수에서 맞춤형 약물을 복용한 환자군이 더 나은 수치를 기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출처:프리픽)
항우울제, 왜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가 될까?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는 우울증 치료의 대표적인 1차 약물이지만, 두통, 수면 장애, 메스꺼움, 성기능 저하 등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개인차가 아니라, 유전적인 차이, 특히 CYP2D6이나 CYP2C19 같은 약물 대사 유전자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예를 들어 CYP2D6 기능이 떨어지는 사람(poor metabolizer)은 약물이 체내에서 잘 분해되지 않아 농도가 높게 유지되면서 부작용이 심해질 수 있고, 대사가 너무 빠른 경우(ultra-rapid metabolizer)에는 약효가 나타나지 않거나 빨리 사라질 수 있다.
또한 SNRI나 TCA(삼환계 항우울제) 계열 약물에서도 이런 문제는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예로, 노르트립틸린(nortriptyline)이나 이미프라민(imipramine) 같은 약물은 심박수 변화, 구강 건조, 체중 증가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 또한 유전자 정보를 통해 사전 예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약물 부작용은 단순히 ‘체질’ 문제로 치부되곤 했지만, 약물유전체학은 이 체질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제는 약물 부작용조차 예측하고, 미리 회피할 수 있는 치료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학의 새로운 전환점
이러한 연구는 정신과 진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단순히 증상만을 기준으로 약을 처방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는 객관적인 생물학적 지표에 기반한 진료가 가능해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일부 병원에서는 정신과 진료 초기에 유전자 검사를 함께 시행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일부 병원에서 개인 맞춤형 정신약물 유전자 검사(PGx 테스트)를 시도하고 있다.
약물유전체학은 특히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에게 중요한 돌파구가 된다. 여러 약물을 거쳐도 호전되지 않던 환자들에게 유전자 기반 정보는 ‘이제는 내 몸을 이해한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
맞춤형 정신의학, 이제 가능성이 아닌 현실
이제 정신과 약물도 더 이상 ‘운에 맡기는’ 치료가 아니다. 유전자가 말해주는 ‘나만의 항우울제’는 치료의 정확도를 높이고, 환자의 고통을 줄이며, 보다 빠른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공학이 만들어낸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정신건강 회복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1. Greden, J. F., Parikh, S. V., Rothschild, A. J., Thase, M. E., Dunlop, B. W., DeBattista, C., ... & Altar, C. A. (2023). Impact of pharmacogenomics on clinical outcomes in major depressive disorder: A randomized clinical trial. Nature, 616(7955), 113–121. https://www.psychiatrist.com/jcp/utility-of-combinatorial-pharmacogenomics-in-depression/
2. 배치운, 한창수, 외. (2021). 국내 주요 우울장애 환자 대상 맞춤형 유전자 분석 기반 항우울제 임상 연구. 가톨릭중앙의료원 부천성모병원·고려대학교 안암병원 공동 연구.
3. Hicks, J. K., Bishop, J. R., Sangkuhl, K., Müller, D. J., Ji, Y., Leckband, S. G., ... & Caudle, K. E. (2015). Clinical Pharmacogenetics Implementation Consortium guideline (CPIC) for CYP2D6 and CYP2C19 genotypes and dosing of 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s. Clinical Pharmacology & Therapeutics, 98(2), 127–134. https://doi.org/10.1002/cpt.147
4. Stingl, J. C., Brockmöller, J., & Viviani, R. (2013). Genetic variability of drug-metabolizing enzymes: The dual impact on psychiatric therapy and regulation of brain function. Molecular Psychiatry, 18(3), 273–287. https://doi.org/10.1038/mp.2012.37
5. Kirchheiner, J., Nickchen, K., Bauer, M., Wong, M. L., Licinio, J., Roots, I., & Brockmöller, J. (2004). Pharmacogenetics of antidepressants and antipsychotics: The contribution of allelic variations to the phenotype of drug response. Molecular Psychiatry, 9(5), 442–473. https://doi.org/10.1038/sj.mp.400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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