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
[한국심리학신문=신동훈 ]
“당신이 어떤 언어를 쓰느냐가, 당신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이 도발적인 명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언어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수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이름하여 언어 상대성 이론(Language Relativity Hypothesis),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의 핵심 주장이다.
언어가 사고를 만든다고?
언어 상대성 이론은 20세기 초, 미국의 언어학자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와 그의 스승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안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넘어서, 언어가 자체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인지 과정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어떤 언어가 시간 표현에 세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언어 사용자들은 더 정교하게 시간을 인식할 수 있으며, 특정 색깔에 대한 어휘가 더 많은 언어 사용자들은 더 미세하게 색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밖에 언어 상대성 이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호주 북부에 사는 쿠크타이어(Kuktaiyer)족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왼쪽’, ‘오른쪽’ 같은 상대적 방향어 대신, 항상 동서남북의 절대적 방향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테이블 위에 컵을 놓는 상황에서 우리는 “컵이 접시의 왼쪽에 있어”라고 말하지만, 쿠크타이어 사람들은 “컵이 접시의 남쪽에 있어”라고 말한다.
이런 언어적 습관은 단순한 말의 차이를 넘어 인지 능력의 차이로 확장된다. 실험에 따르면, 이들은 전혀 낯선 환경에서도 자신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리적 방향을 놀라운 정확도로 기억해낸다. 이처럼 사용하는 언어가 공간을 지각하고 기억하는 방식 자체를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가 ‘파란색’이라 부르는 색 하나도 언어에 따라 달리 구분된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는 파란색을 표현하는 두 개의 주요 단어가 있다: 밝은 파란색(“голубой”, 골루보이)과 어두운 파란색(“синий”, 시니). 이들은 영어 사용자들이 모두 ‘blue’라고 부를 법한 색상도 명확히 두 범주로 나눠 인식한다.
실험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이 두 색을 더 빨리 구분하고, 색 구분 과제를 수행할 때 반응 속도가 더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영어 사용자들은 두 색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인식했다. 이는 언어 범주가 시각적 지각의 민감도를 조정한다는 점을 시사하며, 말할 수 있는 것이 곧 인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워프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남미 아마존 정글에는 피라하(Pirahã)족이라 불리는 소수가 살고 있는데, 이들의 언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1”에 해당하는 정확한 표현도 없고, 대신 “하나 정도”, “조금”, “많이”처럼 대략적인 수량만을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한다.
언어학자 다니엘 에버렛(Daniel Everett)은 피라하족과 함께 생활하며 이들의 수 개념을 관찰했다. 실험에서 피라하족은 세 개 이상의 물건을 세거나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개수를 기준으로 물체를 정렬하거나 비교하는 능력도 낮았다. 이런 결과는 단순히 교육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수 개념 자체가 언어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되었다. 이 사례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숫자’라는 추상 개념조차도 언어가 없으면 구성되지 않을 수 있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 사고의 보편성은?
그러나 이와 반대로, 보편론적 관점을 지닌 이들은 인간이 언어와 무관하게 사고할 수 있는 보편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주의자들은, 언어는 사고의 도구일 뿐이며 개념 구조와 인지적 처리 과정 및 능력은 선천적으로 뇌에 내장되어 있다고 본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실험이 바로 헤스포스(Susan Hespos)와 스펠케(Elizabeth Spelke)의 연구다. 이들은 생후 5개월 된 영어권 영아들이, 한국어에만 명확히 구분되는 공간 개념인 ‘tight fit(밀착-“끼다”)’과 ‘loose fit(느슨함-넣다”)’을 인식할 수 있는지 실험했다. 영어에서는 두 경우 모두 전치사 “in” 또는 “on”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물체의 상대적인 위치를 표현할 뿐, 밀착되거나 느슨한 공간 개념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즉 영어의 언어, 문법적인 때문에 표현의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권 유아들은 이 공간적 개념의 차이를 인지하고 구별했다. 연구 결과는 언어를 습득하기 이전에 인간이 의미론적 구분을 할 수 있는 보편적 인지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언어는 개념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개념에 이름을 붙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 상대성 이론은 사고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간은 언어가 없어도 생각할 수 있으며, 언어는 그 사고를 외부화하고, 공유하고, 확장하는 수단에 가깝다는 것이다.
말하는 대로, 생각한 대로
무한도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 (2011)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무한도전>에서, 유재석과 이적이 ‘말하는 대로’라는 이름의 노래를 세상에 내보였다. 유재석의 20대 무명 시절과 더불어 그의 삶이 말하는 대로, 생각한 대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는 솔직하고도 덤덤한 고백은 지금까지도 많은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씨름처럼, ‘말이 먼저인가, 생각이 먼저인가’ 하는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언어 상대성 이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한편, 또한 말하는 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내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달렸다. 어떤 하루를,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노랫말처럼 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찬란할 당신의 푸르른 봄날을 믿고 응원한다.
참고문헌
1. Evans, N., & Levinson, S. C. (2009). The myth of language universals: Language diversity and its importance for cognitive science.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32(5), 429–492.
2. Winawer, J., Witthoft, N., Frank, M. C., Wu, L., Wade, A. R., & Boroditsky, L. (2007). Russian blues reveal effects of language on color discriminatio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4(19), 7780–7785.
3. Gordon, P. (2004). Numerical cognition without words: Evidence from Amazonia. Science, 306(5695), 496–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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