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서
[한국심리학신문=이윤서 ]
2000년대 초, 미군의 아부그라이브 감옥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고문과 학대 행위는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 잔혹한 행동을 자행한 주체가 테러리스트나 범죄자가 아닌, 평범한 미국 병사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했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사건은 한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는 정말 누군가에게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1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괴물처럼 악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업무를 충실히 수행한 ‘지극히 평범한 관료’였음을 강조하며, 인간은 특별히 사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고도, 시스템과 명령에 복종하며 거대한 악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개념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학문 분야에서 논쟁과 함께 회자되고 있다. 특히 현대 심리학은 이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이 악행에 가담하게 되는 사회적·심리적 메커니즘을 규명하려 한다.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1960년대에 진행한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비윤리적인 명령을 따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다른 참가자에게 점점 강한 전기 충격을 가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상당수는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했음에도 권위자의 지시에 따라 충격을 계속 주었다.
이 실험은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아렌트의 통찰과도 겹친다. 도덕적 판단의 책임을 외부 권위에 위임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은 이러한 복종의 심리를 도덕적 해체(moral disengagement)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르는 비윤리적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죄책감을 덜 느끼도록 만드는 심리적 전략이다. 예를 들어, 피해자를 비인간화하거나, 자신의 행동이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실제로 기업 부패, 학교 내 따돌림, 조직 내 괴롭힘 같은 일상적 악행들도 도덕적 해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상사의 권위나 조직 내 가치 체계, 또래 집단의 압력은 도덕적 기준을 약화시켜 비윤리적 행동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 다른 심리적 요인으로는 탈개인화(deindividuation)와 책임 분산(diffusion of responsibility)이 있다.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덜 느낀다. SNS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익명성과 집단성은 혐오 발언, 사이버 불링 등의 행위로 이어지기 쉽다.
한 개인이 사회적 역할 속에서 '집단의 일원'으로 기능하게 될 때, 자신의 행위를 '개인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이히만의 모습과도 겹친다. 그는 자신을 “운송 책임자”에 불과했다고 변명했다. 이는 도덕적 판단과 책임이 ‘업무’라는 외피에 의해 흐려지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통찰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 구조와 명령 체계 안에서, 우리는 종종 윤리적 판단보다 복종, 효율, 책임 회피를 우선시하도록 요구받는다. 경찰, 군인, 회사원, 학생, 그리고 심지어 부모와 교사까지도 말이다.
누군가 “나는 절대 그런 짓 안 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심리학은 말한다. 당신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이 지점에서 아렌트의 물음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가정을 돌보며, 상사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평범함 속의 무비판적 복종이, 수백만 명의 학살에 일조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악’이라고 판단하는 행위들이 사실은 특별히 사악한 누군가가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벌이는 것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역할: 침묵하지 않는 시민 되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시민 개개인이 도덕적 판단의 주체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상급자의 지시나 집단의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멈출 수 있는 용기와 역량을 길러야 한다.
또한 제도는 개인에게 ‘정당한 거부’와 ‘윤리적 판단’을 허용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장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문화, 비윤리적 관행을 개선하려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비극이 타인의 일로 느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언제든 구조적 폭력에 가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걸음일지 모른다. 아렌트는 말한다. “악은 괴물 같은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생각 없이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참고문헌
1. Fraser, S. J., & Hupp, J. M. (2023). Obedience to authority: Revisiting Milgram in the context of modern social psychology. Journal of Social Issues, 79(2), 410–429. https://doi.org/10.1111/josi.12508
2. Moore, C., Detert, J. R., Treviño, L. K., Baker, V. L., & Mayer, D. M. (2020). Why employees do bad things: Moral disengagement and unethical organizational behavior. Personnel Psychology, 73(2), 299–322. https://doi.org/10.1111/peps.12315
3. Paciello, M., Fida, R., Tramontano, C., Lupinetti, C., & Caprara, G. V. (2020). Moral disengagement and antisocial behavior: A systematic review of literature and meta-analysis. Aggression and Violent Behavior, 50, 101342. https://doi.org/10.1016/j.avb.2019.10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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