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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윤수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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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밤. 잠에서 깬 당신은 허기짐을 느껴 거실로 나온다. 불은 켜지지 않았고, 은은한 달빛이 창가로 스며든다. 그 아래 식탁 위에 놓인 바나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익숙하게 노란색 바나나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잠깐, 어둠 속에서 바나나가 정말 노랗게 보일 수 있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주변 광원이 거의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바나나는 짙은 회색이나 검은색에 가까운 색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이전에 익숙하게 보아온 노란 바나나의 이미지를 불러와, ‘노란 바나나’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처럼 물리적인 시각 정보는 바뀌었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인식은 이전과 같은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지각 항등성(perceptual constancy)이라 부른다. 외부 자극의 조건이 변하더라도, 사물의 크기, 형태, 색채 등을 비교적 일관되게 인식하게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덕분에 우리는 주변 환경이 변해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안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사물은 빛의 양이나 거리, 각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 변화를 자동으로 보정하며 “익숙한 세상”을 유지하려 한다.




변했지만 같은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뇌의 속임수


지각 항등성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크기, 형태, 색채의 항등성이 그것이다. 이 각각의 항등성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보정된 진실’을 보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첫째, 크기 항등성(size constancy)이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멀리 앞서 달리는 차는 작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작은 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 뇌는 ‘실제로는 큰 차’라고 보정한다. 아이가 놀이터 끝에서 손을 흔들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멀리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이처럼 시야에 맺힌 상의 크기가 작아졌더라도, 뇌는 거리 정보를 반영해 실물의 크기를 유지시킨다.


둘째, 형태 항등성(shape constancy)이다. 도서관 책상이 사선으로 보일 때, 책상 모서리는 마름모꼴처럼 찌그러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직사각형 책상’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문을 열거나 닫을 때도 마찬가지다. 문이 기울어지며 시각적 형태는 계속 바뀌지만, ‘문’이라는 정체성은 유지된다. 뇌는 보는 각도에 따라 생긴 왜곡을 보정해, 본래 형태를 복원한다. 이런 보정이 없다면, 세상은 마치 만화경처럼 끊임없이 요동치는 이미지로만 보일 것이다.


셋째, 색채 항등성(color constancy)이다. 빨래를 개던 중, 햇빛이 드는 창가에서 봤을 때 분명 하얀 티셔츠였는데, 거실 조명 아래로 옮기자 티셔츠가 약간 노르스름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여전히 ‘하얀 티셔츠’라는 걸 안다. 뇌는 조명의 색이나 강도, 주변 물체의 색상을 고려해 본래 색을 보정한다. 이는 특히 다양한 조명 아래서 일하는 사진가나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지각 능력이다.


이처럼 지각 항등성은 시각 자극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계를 안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매 순간 변화하는 감각 정보를 정제하고 재구성해주는 뇌의 ‘자동 편집 기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놀라운 능력이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보다 믿는 것을 본다


문제는 지각 항등성이 감각적 정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뇌는 감정이나 대인관계에서도 이 ‘보정 기능’을 작동시킨다.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을 한 번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나면, 이후의 부정적인 행동조차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를 떠올려보자. 연인이 무심하게 메시지를 씹었을 때도, “바빴겠지”라며 넘어간다. 기념일을 잊고 지나가도 “원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니까”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뇌는 한 번 형성한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는 해석틀을 고수하며,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는 아예 인식하지 않거나, 재구성해 받아들인다.


이러한 현상은 연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친구, 부모, 선생님, 상사 등 우리가 친밀하게 관계 맺고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상대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익숙한 감정의 틀 속에서 그들을 ‘예전 그대로’라고 지각한다. 갈등이 생겨도 ‘일시적인 일이겠지’라며 애써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본질적인 변화의 신호를 무시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감각 정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기존 신념에 맞게 세상을 조율하는 데 더 익숙하다.




익숙함이 가리는 것들


지각 항등성은 분명 우리가 안정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해 주는 강력한 기능이다. 하지만 반대로, 변화의 징후를 놓치게 만드는 맹점이 되기도 한다. 책상 위의 컵은 오래 써서 가장자리가 조금씩 닳고, 손잡이엔 작은 금이 가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걸 ‘늘 쓰던 컵’이라며 무심히 넘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미 많은 것이 변했는데도, 익숙한 기억에 기대어 ‘예전 그대로’라고 믿어버린다.


특히 감정적 관계에서는 이 기능이 우리를 더 깊은 착각 속으로 이끌 수 있다. 마음이 떠나간 친구, 예전과 달라진 가족, 이제는 더 이상 같은 꿈을 꾸지 않는 연인. 우리는 그 변화들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예전의 친밀감을 기준 삼아 현재를 해석해버린다.


모든 것이 ‘같아 보이는’ 그 순간, 우리는 진짜 변화를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낡은 컵이 조금씩 바래고 모서리가 깨졌듯이, 관계도 감정도 서서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예전 그대로’라고 믿는다. 지각 항등성은 우리에게 안정된 세계를 보여주지만, 때론 가장 가까운 변화를 외면하게 만드는 착각이 되기도 한다.


익숙함에 속아 변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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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7-18 08: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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