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여정
[심리학 신문_The Psychology Times=임여정 ]
고아이거나 고아원을 전전하는 등 어린 시절 고난을 겪은 주인공이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종국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은 영웅 서사의 클리셰다. 영웅 서사가 아니더라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결국에는 일과 사랑을 모두 잡는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실패했을 경우 불안정 애착이 형성되며, 추후 형성하는 인간관계에서 회피-불안정 애착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영국 정신분석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의 애착 이론에 따르면 어린 시절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인 부모와의 애착 관계 형성 여부는 차후 맺는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에 따르면 인생 첫 관계 맺음 대상인 부모와 애착 관계를 안정적으로 형성한 아이는 “안정 애착”을 형성하게 되나, 그렇지 못한 아이는 대개 `불안정 애착형’으로 변하거나, 친밀한 관계가 필요 없다고 확신하는 “회피 애착형”으로 자란다. 이 중 “회피 애착”이 형성된 아이는 타인에 대한 기대감이 낮고, 지나치게 자립적인 성향을 보인다. 이에 더해 심리학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과 또래로부터의 거부와 같은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 요인의 결합이 회피형 성격장애의 발병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이렇게 형성된 회피형은 자주 최악의 연인으로 손꼽힌다. 연락 문제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갑작스레 연락을 끊기도 하고, 예고 없이 ‘잠수’를 탔다는 사례 속 주인공들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연인에게만 잠적을 한 것이 아닌 그 누구와도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되는 경우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물론 관계 맺음의 소용돌이 속 ‘대화로 해결하면 갈등만 쌓이니 서서히 멀어지는 쪽이 편하다’라는 생각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절을 두려워해 갈등 상황을 피한 것이 청소년기부터 장기간 지속되어 습관화되었거나, 이로 인해 우울감과 불안까지 느낀다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학업, 직장 등 일상생활에서까지 영향을 받는다면 단순 소심한 성격이 아닌 “회피형 성격장애”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성격장애란 어린 시절부터 서서히 발전되어 지속되다가 초기 성인기 즈음 공고화되는 개인의 병리적인 정서 및 행동양식이다. 단순 성격과 달리 업무와 인간관계에서 지속적인 불편감과 부적응을 초래해 정신 의학적 측면에서 장애로 간주한다. 미국 정신 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정신 장애 진단통계 편람 (DSM-V) 은 총 10개의 성격장애를 A군, B군, C군의 3개 범주로 분류한다. 그중 회피형 성격장애는 C군에 속한다.
회피성 성격장애 (avoidant personality disorder)는 거절에 민감하고 사회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인격장애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 내면에 타인과 친밀하게 지내고 싶은 애정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관계 맺음의 욕구보다 타인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우선시된다. 이 때문에 타인과 소통을 원하는 속마음과 달리 처음부터 관계 형성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결국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불안을 느끼고 스트레스에도 취약해진다.
모든 인간관계는 거절과 상실의 위험성을 동반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은 기존의 인간관계를 노력으로 유지하기도 하고, 오랜 친구와 연락의 부재로 멀어지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회피형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이들은 만나던 사람들만 일관되게 만나는 경우가 많으며,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해 싱글 생활을 선호하기도 한다, 설령 연애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이별 과정 중 자신의 단점을 정당화해 버리는 경우엔 회피 성향이 강화되기도 한다.
거절이 두려워 시작을 꺼리는 회피성 성격장애의 주된 정서는 열등감이다. 따라서 작은 성취 경험의 축적으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효율적인 치료제가 될 수 있겠다. 실제로 치료가 필요한 회피형 성격장애의 진단 항목에는 “자신을 매력이 없는 열등한 사람으로 평가하나요.”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는 것만 인식해도 타인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가장 나쁜 결정은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은 외면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거절이 두려워 만남 자체를 회피하는 것은 자신에게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행사하는 폭력이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절이 두려워 새로운 시도를 꺼리니 자연스럽게 활동 범위도 좁아질 것이고, 발전도 더딜 것으로 추측된다.
드라마나 영화 속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한 주인공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간다. 크루엘라는 어머니의 부재에도 패션을 향해 나아가며, 드라마 “퀸스갬빗”의 고아원 출신인 베스 허먼은 체스를 향해 나아간다. 살인병기로 키워진 블랙위도우와, 어린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아들에게 살인 임무를 준 아버지를 둔 샹치도 “안정애착”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러나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끊임없이 나아가며 편안함을 느끼는 영역에서 벗어나 불편감을 감수한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관계는 상처 입을 위험을 감수했을 때 형성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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