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민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이선민 ]
당신, 정말 슬프지 않은가요?
“여보세요. 응, 저녁은 먹었어? 할머니가 돌아가셨네.”
누구보다 담담한 목소리로 이 소식을 전한 건 엄마였다. 9년 전 대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해오다 너무 힘드셔서 치료를 포기하시고 남은 생을 보내오시던 할머니셨기에, 누구나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걱정했던 일이었다.
2주 정도 남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땐, 6개월 정도 남았다고 했을 때도 2년 더 사셨으니까, 2주면 몇 달은 더 사실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됐기 때문이었을까?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알고는 있었지만 누구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상했으나, 갑작스럽고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나도 말문이 막히는데, 엄마는 너무나 담담했다. 오늘 장례를 치러야 할 것 같아. 일정에 차질이 생기진 않겠어? 라며 오히려 나의 걱정을 해줬다. 장례식 내내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너무 못돼 보이게 나왔다는 둥, 애꿎은 농담으로 적막을 채웠던 엄마는 장례식 동안에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잠이 오지 않는다며 혼자 맥주를 마시며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던 엄마의 모습은, 정말 너무 허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었지만, 누구보다 슬퍼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갑자기 눈물이 났던 나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내가 눈물을 보이자 그제야 왜 우냐며, 같이 눈물을 보였던 엄마. 사실은 누구보다 울고 싶었지만 꾹꾹 누르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슬픔을 속이는 방법, 주지화
너무 큰 슬픔이나 고통이 닥쳤을 때, 자아는 그 상황 속에서 오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그 중 ‘주지화’라는 방어기제는 불편한 감정을 조절하거나 최소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사고하거나 일반화함으로써 감정적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처리하고자 하는 방어기제이다. 사람들은 보통 상황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마주했을 때 오는 고통이 너무 클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한다.
방어기제 주지화를 사용하는 것은 불안을 극복하고, 불안에 압도되지 않도록 자아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주지화를 지속적으로 과도하게 사용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사람은 그 당시, 그 자리에서 느꼈어야 할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그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 시시때때로 자신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슬픔을 마주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지만, 그 자리에서 직면해야 가장 작은 슬픔이 된다는 것이다.
마음껏 슬퍼해도 괜찮아
그날 한 번 눈물을 보였던 엄마는, 그 후로도 가끔 할머니 얘기가 나오면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아직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고 힘들어 보이지만, 무조건 억누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그전보다는 덜 힘들어보여 안도가 된다. 슬퍼해야 할 순간에, 마음껏 슬퍼해도 괜찮다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을 그 당시에 느끼는 것이 가장 덜 괴로울 것이라고. 우리 엄마처럼 어디선가 슬픔을 꾹꾹 참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참고자료
•김춘경 외 4명. (2010). 상담의 이론과 실제.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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