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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주영지 ]


“언니, 내가 어려서 못 들어가는 거야?”


얼마 전 곤란한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어린 조카를 데리고 외식을 하러 갔었다. 들뜬 조카의 손을 꼭 잡고 식당 문을 들어선 순간, “저희 매장은 ‘노키즈존’이라 어린이 손님은 받지 않습니다”는 말 한 마디에 우리는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아뿔싸. 나오고 나서야 입구에 아주 조그맣게 “노키즈존”이 적힌 것을 발견했다. 조카는 본인이 어려서 못 들어가는 거냐며 나를 향해 물어왔다.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노키즈존”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입장은 명확하다. 어린이는 뛰어다니고, 시끄럽고, 위험하니 출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 존재 자체로 부정당하는 아이들



물론 영업장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미움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 영업주가 이들을 내쫓을 권리를 갖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때 문제시되는 것은 ‘행동’이다. 만약 식당 내에서 흡연하는 행위가 문제가 된다면, 흡연자의 출입 자체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흡연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규제하게 된다. 가게에서 뛰어다니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부순다면 사람이 아닌 그 행위 자체가 제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노키즈존은 어린이가 실제로 문제 행동을 일으키기도 전에 어린이라는 집단 전체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보며, 이들을 잠재적 위험 집단으로 간주해 접근을 아예 차단해버린다. 이는 어린이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며, 심각한 기본권 침해를 초래한다.


"영업장을 이용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전에 소란스러운 어린이를 봤다고, 또 이를 제지하지 않은 “맘충(역시 혐오가 스며든 단어)”을 봤다고 해서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차별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부정당하고 있다.

 



· 왜 배움의 기회를 차단한 채로 아이들에게 완벽하기를 요구하는가


낯선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을 상상해보자.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외국의 카페에 갑작스럽게 떨어졌다면, “제 커피는 디카페인으로 해주시고, 카라멜 시럽은 두 펌프, 그리고 우유는 꼭 저지방 우유를 넣어주세요”라고 능숙하게 주문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바디랭귀지를 써가며 더듬더듬 말할 수밖에 없다. 이때 직원이 왜 완벽한 외국어로 주문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면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어린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사회 규범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에게 어째서 완벽함을 바라는 것일까. 어린이가 조금 실수하더라도, 그것은 배움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가 조금의 여유만 가지고 기다린다면 어린이는 분명 그를 통해 성장할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유명한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예절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다. 이는 모두 사회와 소통하며 터득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관용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노키즈존은 어린이가 사회에서 배울 모든 기회를 원천 차단한다. 이는 결국 미성숙함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유치하고 이기적인 차별이다.

 



·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쉴틈없이 달려가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와 다른, ‘보통’의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은 배제해도 된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영업주는 “보통”의 정의에서 벗어난 존재인 어린이를 “나와 다른 존재”로 여기고, 이들을 거부하여 노키즈존을 만든다.


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라는 인식이 과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대개 갈등은 이러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혐오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소한 차이에서 시작된 갈등은 곧 차별이 사회에 스며들게 하고, 혐오 심리를 초래하며, 결국 혐오 범죄로까지 이어진다. “보통”이 아닌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배척당하고 차별당하며 자란 어린이는 사회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 어린이는 영원한 어린이가 아니다. 그들이 자라 어른이 되고, 사회를 이끌게 된 시점을 상상해보라. 노인이 된 우리는 존중받을 수 있을까? 완벽하게 미래 사회의 “보통”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존해야 한다. 나와 다르다고 틀린 존재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는 노키즈존에 대해 “아동을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고 아동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며 “아동이 살기 좋은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강조했다.


“아동의 권리는 무시한 채 무조건 아이는 안 된다고 금지하는 것이 과연 온전히 영업의 문제인지, 사회적 합의는 바로 이런 데서 필요하다. 세계 최저 출생률 0.84, 이 수치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며 “이제는 국가가 돌봄의 주체가 돼야 한다. 온 사회, 온 나라가 아동을 함께 지키고, 함께 손잡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영업장에 피해를 줄 수 있는 특정 행위는 규제하면서도, 어린이를 배려하는 다앙한 조치들이 노키즈존보다 더 먼저 필요하다. 아이라는 집단 전체가 규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다 조심스럽게 이용해야 하는 공간에 출입조차 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과연 어디에서 “정숙”을 배워야 할까. 나는 차별과 혐오로 얼룩진 사회가 두렵다. 길거리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음소리가 더 많이 들리길 바란다.





참고문헌 

김도균, 유보배. (2016). 노키즈존 확산,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슈&진단, (221)

정의당 국회의원 심상정입니다., “아동이 살기 좋은 나라가 선진국”, https://blog.naver.com/713sim/222571722142, 202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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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1-14 09:01:18
  • 수정 2022-01-14 09: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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