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예솔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추예솔 ]
이미지 출처. StockSnap
누군가를 알아가고 연애에 골인하는 데까지는 부푼 설렘으로 가득하다가, 시작과 더불어 마음이 식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때 거절 의사를 표할 경우 상대방은 당혹감과 허무함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 역시 마음을 자의로 컨트롤할 수 없는 데 대해 답답함과 미안함을 감추기 어렵다. 필자 역시 과거에 위와 같은 경험으로 적잖은 곤혹을 느꼈다. 이는 줄줄이 짧은 기간의 연애만을 거듭하는 상황을 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필자는 ‘왜 감정은 연속적이지 않은가’에 대해 끊임없는 의구심을 품었고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일명 금사빠 금사식(금방 사랑에 빠지고 금방 사랑이 식는다)이라는 신조어의 등장이 표방하듯, 이는 적잖은 이들이 겪고 있는 현상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가능성 있는 몇 가지 원인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물론 단일한 이유만이 전부가 아니고,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여 필자와 유사한 고민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면, 함께 다각도에서 원인을 살피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상대를 일정 틀에 가두어 이상적인 형태로만 바라보았을 경우
첫째로, 극단적인 이상주의자의 경향이 연애 중에 극대화된 경우를 꼽을 수 있다.
대개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취하는 패턴이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상대방을 경계하며 단점을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점은 거세한 채 장점만 수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객관적으로 떨어져서 두 가지의 과정을 동시에 벌이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극단적인 이상주의자’의 경우에는 여기서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사람을 볼 때 단점이 보이더라도 혹여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점철돼 있고, 갈등을 필사적으로 지양한다. 또 웬만해서는 상대를 비판 없이 수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 경우 상대방에 대한 단점을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최대한 무시하거나 외면하며 장점만을 극대화한다. 이렇게 자신만의 여과를 통해 사람을 바라본다면,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상대의 특정 면면’을 마주했을 때 충격이 배가된다. 나아가 불쾌감과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감정이 빠르게 식는 것’은 극단적인 이상주의자 경향을 가진 사람이 상대방을 깊이 있게 파악하려는 노력 없이 자신의 환상 속에서 주조하고, 특정 틀에 가두려 한 데서 기인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보는 사랑에서 만지는 사랑으로의 변모
둘째로, 상대방과 일정 거리를 둔 채 정서적 교감만을 느끼는 ‘플라토닉적인 사랑’에서, 모종의 스킨십이 오고 간 ‘에로스적인 사랑’으로의 변모 과정에서 돌연한 거부감이 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잠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주장한 '아브젝션'이라는 개념을 끌어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젝션'이란, ‘비체’(비천함)와 동일어로, ‘정체성과 체계, 그리고 질서를 교란하는 무언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람이 ‘사회화 이전의 시기’에서, 언어의 습득을 통해 ‘사회화되는 시기’로 넘어갔을 때, 타액과 같은 배설물이나 분비물이 자신과 섞이게 될 때 그것을 ‘아브젝션’이라고 여기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아브젝션’의 정의를 빌려와 감정이 급속도로 식는 이유를 살피자면 이렇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언어를 배우고, 교육을 받고, 타인과 교류한다. 또 사랑을 나눈다.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무언가와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을 ‘아브젝션’ 즉, ‘거부감이 들게 되는 무언가’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앞서 ‘아브젝션’이 발생하는 지점을 ‘플라토닉에서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변모할 때’라고 특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무조건 에로스적인 사랑을 나눈 경우만으로 국한할 수는 없다. ‘아브젝션’은 ‘비천함’이라는 뜻 외에 ‘주체가 아니다’라는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아니라는 뜻’으로서의 아브젝션은 주체가 ‘나와는 다른 타인’과 어떤 방식으로든 섞이게 됐을 때 드는 원초적인 거부감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거부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고, 이내 마음이 식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 수도 있는 셈이다.
자기중심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상대의 마음을 이용한 경우
마지막으로 ‘자존감 제고’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타인의 마음을 이용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이전에, 먼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방법’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사람마다 본인의 자존감을 올리기 위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타인을 통해 제고하는 경우도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누군가를 통해 채운 자존감은 그 타인이 부재하면 다시금 결여될 가능성이 있기에, 홀로 설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인도에 떨어져 살고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관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자존감을 채울 수 있는 방식이 온전히 타인의 영향권을 벗어나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렇다면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올리는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끊임없는 칭찬이나, 협력적인 활동에서 비롯한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다소 불안정한 방식으로 끌어올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바로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며 관심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본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지표로 이용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러한 경우는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보다, ‘자신의 가치를 제고하려는 목적’이 압도적으로 큰 비율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상대에 대한 호감이 급속도로 식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니, 애초에 호감이 있었던 것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추가로 ‘쾌락주의자’와 같이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함이나, 소유욕이 극대화된 경우에도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미 자신에게 마음을 다 보이고 매달리는 사람은 구태여 적극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고, 본인은 훨씬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모종의 기대감 (내지는 오만)에 사로잡힌다. 하여 위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접근하고 마음을 이용하는 셈이다.
마치며
앞선 주장들은 다소 적나라해서 외면하고 싶은 심리일 수 있다. 그러나 불편하다고 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면을 더욱 과감히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난감한 상황에 노출될 때마다 스스로 고찰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몇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원인을 도식적으로 분류하고 여러 항목을 통해 문서화해놓았지만 기실 사람의 심리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하여 여기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감정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타올랐다가 사그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쩌면 ‘한순간에 감정이 식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이해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므로 무조건 자책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때로는 자신을 보듬을 수 있었으면 한다. 이는 상대방에게 줄 상처까지 포용하고 무작정 옹호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저 필자와 닮았을지 모를 당신이 더는 혼란 상태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성공을 이룩했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참고문헌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문예신서 116, 2001
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 여이연, 2017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