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림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이해림 ]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무엇을 목표로 잡아야 나의 행동과 성취가 유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아마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나를 잘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여섯 가지 원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원형들은 자신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자아의 경계를 넓혀 타인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한다.
인간의 여섯 가지 원형
모든 인간이 가진 여섯 가지의 원형 중 첫 번째는 ‘순수주의자’로, 낙관적이며 수용력 있는 태도를 지녔지만, 부정적인 면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눈 감는 것이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갈 사람은 많기 때문에 회피 심리를 가지며, ‘방관자 효과’ 또한 순수주의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원형 ‘고아’는 외로움을 느끼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가 불가하다. 내 안의 에너지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열망을 외부로 투영시키기도 하는데, 이때 짝에 도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고아가 느끼는 혼자라는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기 때문에 이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원형은 ‘방랑자’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원형이다. 하지만 여행을 가장한 현실로부터 도피가 계속된다면, 현실의 어른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어렵다는 이유로 피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자신에 대해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 번째 원형, ‘전사’는 사춘기 때 폭력적인 모습과 같이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원형이다. 전사의 부정적인 면은 자신을 넘어설 것 같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이다.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매일 고군분투하는 직장인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다섯 번째 원형은 ‘이타주의자’로, 사회 유지를 위한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희생이 상대에 대한 진심인지, 사랑이라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것이지, 이를 타인에게 투영하는 것은 옳지 않은 모습이다.
‘마법사’는 위의 다섯 가지 원형을 갖추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원형으로, 자신을 드러내 변화를 만들어냄으로써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원형이다. 여섯 가지 원형은 인생의 주기에 나타나 그 시기의 자아를 형성하고 사라진다. 현실에서 극대화된 원형의 해결을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아’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섯 명의 ‘나’
나의 순수주의자는 남의 어려움에 대한 회피를 소극적인 성격으로 합리화하는 모습이다. 과거에 폐지가 무거워 줍지 못하고 계시는 어르신을 도우려다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돕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는 소극적인 성격보다도, ‘나 아니어도 도울 사람은 많다.’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현재의 나도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합리화하는 경우가 잦으며, 이는 불편한 마음의 원인이 된다.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에서 나오는 불편함을 위해서라도, 미래의 나는 타인의 도움을 외면하는 경우를 줄여야 한다. 불편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외면해도 되겠지만 나를 지켜본 결과, 그럴 가능성은 적기 때문이다.
고아는 과거, 현재의 나에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고, 차지하는 원형이다. 초등학생 때, 따돌림을 겪은 후 독서만 하며 한 학년을 보냈는데 단순히 외로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에너지를 책이라는 외부 요인으로 풀었기 때문에 고아의 원형이 지배적이었던 한 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고아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자주 비롯된다. 부모님과의 언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세상에서 혼자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갈등이 없을 때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러한 외로움은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에 즐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방랑자는 나의 현재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작지만, 과거에는 컸던 원형이다. 수험생 때, 입시에 대한 부담감으로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공부 외의 행동을 수험 생활의 원동력, 즉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여겼지만, 핑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당시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기억을 교훈 삼아. 현재의 나는 미래를 위해 작은 일에도 힘을 다해 임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부끄럽지 않게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전사는 과거의 나, 대학생으로 보낸 첫 학기에 나타났다. 힘든 수험생활을 보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는 ‘공부를 잘하는’ 대학생이 되어 죄책감을 덜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노력보다 낮은 학점에 우울해했으며 그토록 바라던 대학생이 되었지만, 잦은 짜증과 풀죽은 모습으로 주변인과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한 학기를 보낸 후에 깨달은 점은 현재의 나를 위한 노력을 해야지, 과거의 나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나는 공부뿐 아니라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정성을 쏟되 후회 없는 마무리 짓기가 미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직장인이 된다면, 전사의 부정적인 면이 또다시 나타나겠지만, 현재를 충실히 보낸 기억이 완충재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막연히 미술의 꿈을 꾸었던 중학생 때의 나는, 진로를 고민하던 친구에게 망설임 없이 미대 진학을 추천했다. 미술의 ‘미’ 자도 모르고, 친구의 경제적 부담은 고려하지 않은 채, 내가 희망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큰 희생을 보이진 않았지만, 내 꿈을 투영시켰다는 자체로 이타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나도 종종 취업과 진로 고민 중인 친구들을 만날 때 이타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책을 읽으며 당시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친구들처럼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주의해서 보여야 할 원형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마법사의 원형은 현재를 포함한 코로나 19 이후의 나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잘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비롯된 틈으로 불안정했기 때문에 마법사가 나타난 경험이 없다. 하지만 코로나 19 이후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깨달았고,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했으며, 공모전에 참여하는 등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사실 내년에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면, 마법사의 원형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미래의 또 다른 마법사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즐기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나’를 즐길 수 있는 오늘 하루가 주어진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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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캐럴 피어슨. (2020). 나는 나.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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