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사랑을 더 하고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줄리언 반즈의 소설 <연애의 기억>의 첫 문장이다. <연애의 기억>은 19세 청년과 사십 대 중년 여성의 10년에 걸친 사랑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동시에 한 중년 여성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에둘러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소설 첫 문장에는 사랑을 하면 괴롭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왜 사랑을 하면 괴로운가? 영화 <최악의 하루> 속 대사에서 현답을 찾을 수 있다. 연애는 남과 여, 두 사람이라는 최소한의 관계 속에서 자기 욕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관계이다. 자기모순의 한계가 드러나는 서사이다. 간단히 말하면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욕구의 충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악의 하루>는 은희가 하루 동안 겪는 이야기이다. 은희는 무명 배우로 서촌과 남산을 오가는 동안 세 명의 남자를 만난다. 은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연애사가 남산이라는 공간에서 드러난다. 남산을 배경으로 하는 로드무비로 우리는 은희를 따라 '연애 여행'을 하게 된다.
미래의 연애
연애 과정 중 가장 설레는 시기는 썸 타는 기간이 아닐까. 이 시기에 상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상상 속에서 상대를 내 이상형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을 활발히 한다. 나에 대한 정보를 노출할 때도 세심하게 선별해서 상대가 좋아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하는 단계이다. 연애가 본 궤도에 오르면 상대의 호불호에 상관없이 '나'를 서서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이면서 나는 내 정보를 노출하는 통제력을 점점 상실한다. 상대에게 편안해 지면서 주의력을 잃기 때문이다.
은희는 남자 친구를 만나러 남산에 가는 길에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를 만나 길 안내를 하게 된다. 소설가가 길을 물었을 때, 지나쳐도 되는데 은희는 왜 직접 길을 안내하는 친절을 베풀었을까. 그녀는 남자 친구가 오고 있는지 다그쳐도 그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영화 통 털어서 '최악의 하루'를 맞이할 은희가 웃는 것은 남자 친구 앞이 아니라 오늘 처음 본 소설가 앞이다. 은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설가와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웃는다. 시작하는 연인은 서로에 대해 궁금해서 묻고 대화하는 시간 속에서 사랑의 싹을 키우고 가꾸면서 열매를 맺어간다.
은희의 욕구와 소설가의 욕구가 일치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은 인식하지 못 하지만 각자 힘든 하루를 보냈다. 해가 저물어 어두워져서 두 사람은 남산에서 다시 마주친다. 하루에 두 번 우연히 마주치는 남녀는 다음 작품은 해피엔딩일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어둠 속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다. 새로운 사랑이 가능한 이유는 '이번에는 해피엔딩'일 거라는 희망이 덕분이다.
현재 연애
현재 은희의 남자 친구는 아침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다.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배우이다. 남자 친구는 촬영 중 쉬는 시간에 은희를 만나러 왔다. 마스크와 선글라스,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잔뜩 의식한 채 나타났다. 은희는 못 마땅하다. 대낮에 남산 산책로에서 있지도 않은 팬의 시선이 자신보다 더 중요한 남자 친구라니. 벌써부터 스캔들을 걱정하는 남자 친구가 밥맛없다. 하지만 은희는 이런 미묘한 감정의 실체를 잘 모른다. 만나서 티격태격하는데 남자 친구는 은희의 마음을 모른 채 신이 났다. 그러다 은희가 토라져서 혼자 앞서 갔다. 남자 친구가 은희를 부르며 뒤따라 가다 다른 여자 이름을 불렀다. 남자 친구는 사과하고 변명을 하지만 은희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남자 친구는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기 위해 은희의 과거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내면서 최악으로 치닫는다.
은희의 숨은 욕구는 남자 친구가 아무리 이름이 알려진 배우여도 배우 이전에 자신의 존재가 그의 커리어보다 우선순위이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남자 친구는 커리어와 배우라는 정체성에 더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욕구가 충돌했다. 연인 사이에 욕구 충돌은 매우 빈번하지만 말로 하기에는 너무 미묘하고 쪼잔해 보여서 혼자 삼키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 연애가 궤도에 오르면 마냥 즐겁지만은 이유이다.
과거의 연애
은희가 남자 친구와 다투면서 과거 연애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은희는 남자 친구와 헤어져 있던 한 달 사이에 유부남을 만났다. 소설가는 소설에서 최소한의 관계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어한다고 했다. 소설가의 바람이 은희의 연애사에 구현되었다. 은희의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남자는 은희를 속였으며, 무려 1년 이상을 만났다. 은희도 결국 양다리를 걸쳤는다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알게 된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동안만 만난 게 아니라 남자 친구를 만나는 동안에도 바람을 피웠다는 말이다. 은희의 연애, 사랑은 무엇일까. 은희는 이렇게 말한다.
연극이란 게 무대 위에 있을 땐 진심이거든요. 근데 끝나면 가짜고.
유부남은 은희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불행해지기로 했어요. 재결합했어요." 이 두 문장에서 남자는 은희와 바람피운 것을 아내가 알게 되었고, 이혼을 고민하다가 다시 살기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의 말속에는 죄책감을 드러내지만 엄청난 합리화가 들어있다. 재결합을 일종의 벌로 여기면서 합리화하는 영리한 사람에게 은희는 짜증이 솟구친다. 바람은 합리화될 수 없지만 은희는 과거 사랑이 하찮은 바람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기를 바란 걸까. 현실은 은희를 계속 따라오면서 관계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를 만났다고 알려준다.
연애는 끝나야 알 수 있는 연극
연애는 당사자가 주인공인 일종의 연극이다. 흥미롭게도 대본도 없는 즉흥 연기를 펼치는 연극이다. 감정과 이성이 줄다리기를 해서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험 과정이다. 사랑이 넘치면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줄리언 반즈의 말대로 사랑을 더 하면 더 괴롭다. 은희의 세포는 사랑으로 넘쳐서 발산하지 않으면 힘들다. 은희는 무명배우, 서촌에서 만난 남자는 소설가이다. 두 사람의 일은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배우도, 소설가도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 모두 보는 사람들도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도록 공을 들이는 일을 하고 있다.
은희는 아마도 다시 연애를 할 것이다. 더 괴롭기를 택하는 용기를 가지고. 은희의 하루는 최악이었지만 다음 날은 설렘으로 가득 찰 것이다. 연애를 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상대를 속이면서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괴로울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사랑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는 은희의 용기에, 나는 비난보다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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