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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신치 ]


2주 전에 보기로 한 친한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다. 만나기 3일 전, 업무 미팅 일정을 조율을 하는데, 오래간만에 만나기로 한 그 친구와 약속한 날만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어쩌지? 이 친구도 너무 오래간만에 보는 거라, 이제 와서 약속을 깨기가 미안한데. 

그런데 지금 하려는 일도 내게는 참 중요하단 말이지. 

그래, 친구는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친구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약속을 좀 미뤄야겠다고 얘기를 했다. 친구는 이유도 묻지 않고, '괜찮다'고 답했다.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일정이 겹치는 경우에 내가 선택하는 기준은 명확한 편이다. 워낙 상황이 다양하기 때문에 한 가지 기준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지만,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정하는 편이다.


'얻어먹을 수 있는가?'

'돈을 벌 수 있는 일과 얼마나 더 연관이 있는가?'

'돈을 벌 수 있는 일과 관련하여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누가 더 편한 사람인가?'



보험영업을 하면서 생긴 습관 같은 기준이다. 매주 전화를 걸어, 다음 주 일정을 잡고, 그렇게 결정된 한 주간의 활동으로 다음 달 월급이 정해지는 시스템 속에서 내게 '내가 할 이 활동이 얼마나 돈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했다. 그러면서 점차 친구들과 수다 떠는 시간은 줄었고, 고객들과 만나는 시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5년 정도 생활하다 일을 그만두자 업무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없어졌고 '만나고 싶지 않으면', '편하지 않은 사람이면' 굳이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일'을 시작했더니 회사 다닐 때보다 '일로써'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중요한 일 때문에 친구와의 약속은 가볍게 깰 수 있었다. 




일을 하다 보니 '제안서'를 써야 했다. 7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했지만, 서류 작업은 해 본 적이 없어 참고가 될 만한 제안서가 필요했다. 방치해 두었던 메신저에 접속 해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동아리 선배와, 대학 동문 모임에서 만난 선배에게 부탁을 했다.


동아리 선배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본인은 사무직이 아니고 막일이라서 그런 파일이 없다는 것이다. 알았다고 답하고 창을 닫으려는데, 선배가 묻는다.


"술은 언제 살 거냐?"




선배의 말에 뜨끔하다. 때는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직장에서 슬럼프로 힘들 던 그때, 같은 동네에 살던 이 선배에게 한 달에 세 번 이상은 연락을 하고 술을 얻어먹었다. 


'선배 뭐해? 술 마시자.' 


이렇게 자주 문자를 보냈고 그때마다 선배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기꺼이 나와 술을 사 주곤 했다.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둔 뒤, 회사일을 그만두자 매일 술을 마시게 했던 힘든 일이 사라졌고, 술을 사줄만한 또 다른 선배가 생기기도 해서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부탁한 또 다른 선배. 선배에게 '잘 지내시냐?'며 부탁을 했다. 선배가 찾아보고 알려주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서 


"이럴 때만 연락하고!"

'헉!'


나는 뜨끔했다.




나의 인간관계란 늘 이런 식이다. 내가 필요하고, 내가 외롭고, 내가 힘들 때만 연락한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의 칭얼거림을 받아 줄 또 다른 누군가가 내 곁에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락을 뚝 끊어버리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던 방식이다. 물론 이런 행동의 저변에는 



이 사람이라면… 내가 언제든 다시 연락해도 받아 줄 수 있으니까.



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언제든 내가 힘들 때 연락해서 볼 수 있는 사람, 내게 술 한 잔 사 줄 수 있는 사람, 내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언제나 나에 대한 애정이 변함없을 사람"


이라는 대단한 착각이다.



하지만 사랑이 언제나 변할 수 있듯, 지인 관계에서도 애정도는 늘 변한다. 이 애정이란 녀석은 가변적이고, 상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주는 애정만큼 내게 돌아오는 애정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운이 좋게 나는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이렇게 받는 것에만 익숙해지다 보니, '내가 줘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 것 같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은 내게 



사람들이 너에게 하는 것만큼 네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라는 못되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 때문에 약속을 미뤘던 친구에게 오늘 문자를 보냈다.

"우리 언제 봐? 나 연애점 좀 봐줘."

"그러자."


아주 짧게 온 문자. 이 문자 하나에 내가 너무 과한 해석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나, 순간 '싸늘함'을 느꼈다. 과장된 혼자만의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나는 친구의 문자에서 


"그래, 너는 네가 필요할 때만 나를 보자고 하니까."


라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졌다. 관계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자격지심에서 온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 장례식에 와서 슬퍼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당장 내가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의 장례식에 와서 더 많이 슬퍼해 줄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왠지 내가 그동안 잘 못 살아온 것 같다. 내 존재가 사라지면 기꺼이 울어주고 슬퍼해줄 사람들을 잘 챙기고 있었나? 나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들이 계속 나를 일방적으로 신뢰하고 좋아해 줄거라 믿고 있는 걸까?



영원한 신뢰, 영원한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삶의 반경이 바뀌고, 가치관도 바뀌면서 내 주변에서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믿어주는 사람들의 존재도 바뀌곤 한다. 내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가 죽었을 때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들'이 10년 뒤, 혹은 20년 뒤에도 나를 위해 울어줄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단지 '나를 위해 진심으로 슬퍼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나의 욕심'일 있을 뿐이다. 존재만으로도 기쁨이 되는 사람들이 분명 있지만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분명히 '서로 노력'해야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일방적으로 노력하는 관계는 결국 한쪽이 지치게 된다. 이제 약속이 겹칠 때 만날 사람을 정하는 기준을 바꾸기로 했다. 


'내 장례식에 와서 더 많이 울어줄 사람'과 만나기로. 


내게 무한 애정을 날려주다 지쳐 나가떨어지려 하는 소중한 이들을 되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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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5-16 21: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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