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우
[The Psychology Times=최지우 ]
... 문장 수집가인 내가 힘들 때마다 떠올리는 문장들 (1)에서 이어집니다.
베르그손의 시간관 - 과거의 존재는 그것의 지각과 무관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서 좌절할 때, 필자는 철학 교양 수업에서 배운 시간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 중 가장 인상깊었던 베르그손의 시간관을 떠올린다.
인간은 무의미를 견딜 수 없는 존재다. 모든 행동과 선택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의미를 찾으려 한다. 모두 각자만의 의미를 찾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무언가를 혼자의 힘으로 해냈을 때, 좋은 경험과 성장을 얻었을 때 큰 삶의 의미를 느낀다. 반대로 오랜 시간 동안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지금껏 노력해왔던 시간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힘이 든다. 나아가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이뤄내지 못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
가시적인 의미를 찾지 못해 힘이 들 때 베르그손의 시간관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물질적 대상들을 지각하기를 멈출 때 그것들도 존재하기를 그친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듯이, 일단 지각된 과거가 사라진다고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공간적 차원에서 현재 지각되지 않는 것들이라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지금 내 옆에 당장 친구가 없어도 현재 친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차원에서도 ‘현재 지각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
강의에서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듣고 과거와 기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지각되는 것=존재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꼭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무언가에 몰두하고 노력했던 그 시간과 경험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모든 것의 의미는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인생의 여러 점들이 이어져 삶을 만든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모든 점들은 우리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향을 준다. 당장은 힘들지라도, 우리의 시간과 노력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보자.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우연히 발견한 책 <에고라는 적>으로부터 얻은 문장이다. 책의 부제는 ‘인생의 전환점에서 버려야 할 한 가지’다. 인생에서 변화를 얻으려면 버려야 하는 것이 ‘에고Ego’라니. 에고의 정의는 다양할 수 있지만 필자는 지금까지 에고를 ‘자아’로 정의해왔고 이 단어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에고를 가지고 있다는 건 나 자신을 잘 알고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에고는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마음’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순간들. 심할 경우 요즘 자주 언급되는 ‘자의식 과잉’ 또는 ‘자기 연민’에 빠질 위험도 있다.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더 나아가 자신만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을 거라 믿는 마음. 필자의 경우에는 자기연민에 빠져본 적은 없지만, ‘눈앞의 삶만 보고 살아갈 때’, ‘나 자신에게 집중할 때’ 필자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원래는 ‘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를 아는 것은 중요하고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나’에 대해 과도하게 생각하다 보면 주변의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고 삶을 매우 근시안적으로만 바라보며 살아가게 된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다 보니, 눈앞에 놓인 것들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삶’에만 생각이 멈춰 있었고 ‘나의 삶’만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더 넓은 타인의 삶, 사회, 세상에는 시선을 주지 못한 채. 그러다 보니 삶을 향해 다가오는 것들이 버겁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내게는 왜 이렇게 힘든 일들만 일어나지’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래서 하나하나에도 쉽게 무너지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다.
이렇게 근시안적인 삶에서 필자가 벗어날 수 있었던, 즉 에고를 내려놓고 편안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지난 기사에도 언급했던 경주 토론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들을 배워 왔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많은 이야기들과 각자만의 상처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동안 대한민국 서울, 대학교 등 필자가 속해 있었던 공동체로만 국한되어 있던 필자의 세계가 무한대로 넓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니,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상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넓디 넓은 세상에서 작디 작은 우주 먼지와 같다는 사실을. 이 사실에 무력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껏 하던 고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하고 좌절해왔었구나. 지금의 세상에서 좀만 벗어나면 정말 무수한 존재와 경험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뼈저리게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쓸데없이 비장해지는 것을 막아준다. 필자는 매 순간 모든 것에 ‘진심’이다. 뭐든 잘해내고 싶어하고 열심히 해서 의미 있는 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크다. 따라서 삶을 열심히 살게 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이 맘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좌절하는 정도도 크다. 매 선택마다 너무 오래 고민하고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작은 일에도 쓸데없이 비장해지는 거다. 실제 내 에고의 크기를 인정하고 비장함을 내려놓으면 삶은 생각보다 매우 쉬워진다.
열심히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세상을 좀 더 넓혀보라는 말이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도 돌려 가며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다.
우리 각자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고유한’ 존재다. 특별함보다 고유함을 인정하면, ‘나’의 고유함은 물론 ‘타인’의 고유함까지 함께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특별함’이라는 단어에는 그 나머지가 평범하고 비슷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고유함’이라는 단어에는 인간 개개인 모두를 존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고유함을 받아들이다 보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 한 권의 책과도 같은 모든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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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집가인 내가 힘들 때마다 떠올리는 문장들 (1)
참고 문헌
라이언 홀리데이, (2017), 「에고라는 적」, 흐름출판.
앙리 베르그손, (1896), 「물질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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