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
[The Psychology Times=서정원 ]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세상은 '실제' 세상과 같을까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뇌를 통해서만' 세상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 즉 내 마음이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실제와 같다고 결코 단언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착시현상이나,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애매한 그림들이 이것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누군가는 이것들에 대해 그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예시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이 기사를 통해 조금 더 우리 삶과 맞닿아 있는 사례들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짐이 무거울수록 가야 할 길이 멀게 느낀다? : 무게에 따른 거리 지각
다들 한 번쯤 가방은 무거워 죽겠는데, 갈 길은 한참 남은 것만 같던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학창 시절, 시험 기간 때마다 이 경험을 했습니다. 학교 가서 공부할 거라고 다 풀지도 못 할 문제집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가던 날이면, 야속하게도 그날따라 학교 가는 길이 더 멀게만 느껴졌지요. 신기하게도 이 경험을 뒷받침하는 재미있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Proffitt(2003)의 연구에서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배낭을 메도록 한 채로 목표지점을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목표지점까지의 거리를 추정하도록 했습니다. 실험은 1m에서 17m까지 다양한 거리 조건을 두고 시행되었습니다. 실험 결과, 모든 조건에서 배낭을 착용한 참가자 집단이 배낭을 메지 않은 집단보다 목표지점까지를 더 먼 거리로 추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Proffitt이 추후에 Witt(2004)과 함께 한 연구에서는 배낭이 아닌, '가벼운 공 사용 집단'과 '무거운 공 사용 집단'으로 참가자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집단별로 각각 표적을 향해 공을 던지게 한 후, 이번에는 자신과 표적까지의 거리를 추정하도록 했습니다. 이전 연구와 마찬가지로, 모든 거리 조건에서 무거운 공을 사용한 집단이 가벼운 공 집단보다 표적까지의 거리를 더 멀다고 추정했습니다.
눈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짐의 무게에 영향을 받는다니, 신기하지 않나요? 한편으로는 이처럼 전혀 딴판인 것 같은 요소 때문에, 우리 능력의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게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도 교훈을 하나 얻은 게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질 때는 가진 짐을 잠시 내려놓아 보는 건 어떨까요?
갖고 싶은 것일수록 크게 느낀다? : 동기에 따른 크기 지각
다음 소개할 연구는 하버드 대학에서 이루어진 아주 고전적인 연구입니다. (Bruner&Goodman,1947) 10살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는데요, 이 실험의 은근히 잔인한 점은 '부잣집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의 집단을 비교해 보았다는 점입니다. 실험에서는 아이들에게 빛이 나오는 상자를 주고 조리개를 통해 빛의 크기를 조절하는 법을 알려준 다음, 빛을 특정 동전(1센트~50센트)의 크기와 똑같이 만들어보게 하였습니다.
실험 결과, 부잣집 아이들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빛으로 동전 크기를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즉, 동전 크기를 더 크게 추정한 것인데요. 연구에서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부잣집 아이들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돈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컸기 때문>이라 해석합니다. 더 나아가 연구에서는, '실제 동전'을 보여준 아이들과 실제 대신 '동전 크기의 원반'을 보여준 아이들로 한 번 더 집단을 나눠보았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실제 동전을 보여줬으니 크기를 더 잘 맞추게 될 것처럼 생각되지 않나요?
하지만 뜻밖의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부잣집 아이들과 다르게, 가난한 집 아이들은 오히려 실제 동전을 보여준 집단일수록, 실제 동전보다 크기를 더욱 과대 추정했습니다. 실제 동전을 보여준 것이 크기 추정에 도움을 주기보다, 도리어 돈에 대한 욕구를 더욱 부추긴 것이지요. 우리는 이 결과를 통해 우리의 욕구, 동기가 클수록 갖고 싶은 목표의 마음속 크기도 커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린아이에게 국한된 결과가 아니냐고요? 그렇다면 아주 어른스러운 연구가 또 하나 있습니다. (Brendl,Markman & Messner, 2003) 바로 흡연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인데요. 이 연구에서는 두 흡연자 집단 중 한 집단만을 대상으로 흡연 필요성을 높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담배가 당기도록 만들었습니다. 연구 시작 전 담배를 피우는 것을 금지하고, 90분짜리 강의를 듣게 한 뒤에 커피를 마시게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 후에 설문지를 통해 평소 자신이 피던 담배의 길이를 표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앞선 결과들로 예상할 수 있듯이, 흡연 필요성이 올라간 집단은 흡연 필요성이 낮은 집단보다 평소 피던 담배의 길이를 더 길게 추정했습니다.
인간은 지극히 주관적인 존재
지금까지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에 따라 지각 능력이 달라지는 사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까지 나온 연구를 응용해서 생각해 볼까요? 어쩌면 우리는 먹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음식을 양이 많게 생각할 수 있고, 갖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물건도 크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소 본인의 정확한 지각 능력에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이런 연구들을 보고 그 확신이 조금은 흔들리지 않으셨을까 싶은데요. 이처럼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몸과 마음의 상태에 끊임없이 영향받을 수밖에 없으니, 세상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자료출처>
Proffitt, D. R., Stefanucci, J., Banton, T., & Epstein, W. (2003). The role of effort in perceiving distance. Psychological science, 14(2), 106-112.
Witt, J. K., Proffitt, D. R., & Epstein, W. (2004). Perceiving distance: A role of effort and intent. Perception, 33(5), 577-590.
Bruner, J. S., & Goodman, C. C. (1947). Value and need as organizing factors in perception. Th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42(1), 33.
Brendl, C. M., Markman, A. B., & Messner, C. (2003). The devaluation effect: Activating a need devalues unrelated objects. Journal of Consumer Research, 29(4), 463-473.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wowowow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