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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김혜령 ]


# "제가 이렇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같은 개월 수의 아들을 키우는 엄마 P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본인은 살면서 좀처럼 화 낼 일이 없었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자꾸 화 내는 일이 잦아진다고 해요. 어제도 물건을 자꾸 던지고 부엌을 엉망으로 만든 아이에게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어보였던 그녀의 남편도 가끔 버럭하는 걸 보니 육아는 원래 이런건가 싶기도 했다고 해요. 저는 P가 했던 말 중에 '제가 이렇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라는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또한 그런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에요. 직장에서도 친구관계에서도 화가 나거나 짜증 날 일이 잘 없는 편이었습니다.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고집이 늘어난 아이를 돌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짜증이 훅 하고 올라올 때가 있어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이게 내가 맞나 싶더라고요. 아마도 저는 제가 화도 짜증도 별로 없는 평온한 사람인 줄 알았나봐요. 대단한 착각 이었던 거죠.


반대로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무뚝뚝한편이었는데,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서 달라졌다는 B씨 입니다. 이제는 다른 아기들도 다 너무 귀엽고 이쁘게 보인다고 해요. 과거에는 딩크족을 고려하기까지 했었는데 이제는 여력이 되면 아이를 셋까지 갖고 싶어졌답니다. 또 어떤 귀여운 생명체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면서 육아는 힘들지만 자신이 아이를 이뻐하고 책임감있게 키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되었기 때문에 자신있다고 합니다. 그분도 스스로에게 놀란건 마찬가지였는데, 아이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사랑표현을 많이 하는 자신을 보면서  '오 내가 이렇게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나?'하게 된답니다. 그동안 그저 공부만 하고 취업준비에 직장생활하며 나를 위해서만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내가 아닌 존재를 위해 정성을 쏟는 자신을 보니 신기했던 거지요. 꽤 기분좋은 변화라고 말하는데 참 듣기가 좋았습니다.


아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납니다. 변화의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큰 변화를 겪게 되죠. 무엇보다 감정의 영역에서 가장 큰 변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분노나 짜증일 수도, 기쁨이나 사랑의 감정일 수도 있어요. 익숙치 않은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를 다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정말로 '아이 때문에' 없던 화가 생겨나고, 없던 기쁨이 생긴걸까요. 전혀 없던 것이 타인으로 인해 짠하고 나타날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내 안에 있던 것이 아이 혹은 아이를 돌보는 특정 상황에 촉발되어져 나온 겁니다. '변화'가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발견'한 거죠. 아이를 통해 나의 몰랐던 부분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관계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보통 '성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성격은 생각, 감정, 행위를 포함한 큰 범위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나타나는 모습이며 일관된 패턴이에요. 학자들이 성격을 정의 할 때 보통 '패턴'이라는 표현을 잘 씁니다. 이 패턴이라는 것이 자극을 통해 나오는 반응이에요. 가장 중요한 자극이 타인과의 만남이고요. 그런데 우리는 '아이'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타인을 만났으니 '나'라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엄청난 무대위에 오르게 된 겁니다.



#  '나'를 키우는 육아(育我)


마치 화학작용처럼 어떤 자극을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는 색과 모양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이 드러나지요.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를 할 때 상대에 따라 다른 모습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셨을 거에요. 어떤 사람은 나의 밝은 면을 끌어내주고, 어떤 사람은 나를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나를 더 피폐하게 만드는 위험한 만남도 있지요. 


이전에는 몰랐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서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하며 놀라는 경우가 생깁니다. 결혼은 그 만남의 심화된 단계고요. 나아가 육아는 완결편이라고 볼수 있을정도로 훨씬 극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만남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이를 키우며 새로운 나를 마주합니다. 하루종일 함께 있는 데다가 밀착된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에 그만큼 나를 더 선명하게 바닥까지 비춰줍니다. 육아의 초기는 일방적으로 돌봄을 주기만 하기 때문에 아이라는 자극으로 인한 반응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점차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변화해가죠. 그에 따라 새로운 나를 서서히 마주하게 되고요. 그렇게 몰랐던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바꿔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라는 타인을 만나고 관계 속에서 새로 드러나는 나를 발견하고 탐구하며 아이와 다름없이 자라는 중인 겁니다. 아이를 통해 '나'를 키우고 있는 거에요. 


"아이 키우는 것도 힘든데 나까지 키우라고?"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아이를 키우는 것은 덤일뿐 인생을 통틀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키울뿐이에요. 긴 인생에서 아이는 아주 잠깐동안 내 옆에 머물렀다 가는 것이고요. 결국 나는 평생 나를 키우는 육아(育我)를 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아이를 낳고 안낳고는 선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나의 성숙을 바라며 아이와의 만남을 기꺼이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문제는 보기 싫은 내가 자꾸 드러날 때에요. 자꾸만 짜증내는 나, 육아의 여러 상황에서 불안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나, 의도치 않게 언성을 높이는 나를 아는 것만으로 성장이라 보기는 어렵잖아요?  그러니 성장이 되기 위해서는 '발견'으로 그쳐서는 안되겠지요.



# 아이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나의 불안


타인을 통해 나를 비춰 보며 몰랐던 나를 이해하는 게 성장의 1단계였다면, 2단계는 새롭게 알게된 나의 부족한 점, 혹은 불안정한 내면을 돌보는게 2단계 라고 할 수 있어요.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나를 다듬고 채우고 조절하는 작업을 해야하는 겁니다. 물론 제대로 이해하는 1단계 만으로도 충분히 달라지는 것들도 많지요. 나의 패턴을 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들은 그러해요. 그러나 거울을 보며 확인한 것이 볼에 묻은 과자부스러기 정도라면 평소에 얼굴을 살피고 다듬는 정도로도 충분하겠지만. 어떤 내면의 문제들은 노력을 통해 다듬고 조절해야 해요.


앞서 말씀드린 P씨 부부의 경우 짜증과 화가 잘 올라온다고 했는데요, 대화를 해보니 둘 다 불안이 높은 편이었어요. 안정지향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왔고 대입, 취업과 같은 중요한 단계마다 가장 안정적인 선택을 하며 크게 불안을 마주할 일이 없었습니다. 부모의 기대에 최대한 부응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어요. 이름있는 대학을 갔고 공무원이 되었어요. 외부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라 인간관계도 넓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모험을 피하며 다행히 큰 위기없이 살아왔죠. 그러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엄청난 모험이 아니겠어요? 아이가 커갈수록 통제가 어려운데다가 2~3살 시기는 안전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때이니 불안을 건드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욱하는 일도 생겼던 거지요. 감정이 동요될 일이 없었던 이전과 달리 계속해서 내면에 파도가 들이닥치니 육아가 꽤나 힘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불안한 상황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아이를 더 통제하느라 소리치는 일도 생겼을 테고요.  P씨와 그 남편은 아이 덕분에 자신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 겁니다. '아, 불안감이 내 안의 꽤 큰 부분이었고 이 두려움을 최대한 키우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구나' 이해하게 되었겠죠. 아이 때문에 화가난다. 가 아니라 아이를 마주하며 내 안에 존재하는 불안을 발견하게 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앞으로도 아이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위기의 상황들을 맞닥들이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불안에 약한 그 마음을 돌보지 않는다면 자꾸만 아이를 다그치고 통제만 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아이를 통해 나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게 되는 대표적인 상황이 '투사'입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내면의 어떤 부분, 혹은 성격적인 특성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의 것으로 돌리는 것을 투사라고 하는데요. 우리는 보기 싫어하는 내 내면의 어떤 부분을 타인을 통해 보게 될 때가 많아요. 만약 몹시 외향적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나대는거야' 하며 그 사람을 싫어할 때, 실은 내 안에도 사람들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어요 또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은 너무 욕심이 많아'하면서 비난한다면 내 안에 있는 욕심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며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요. 


가장 많이 투사되는 건 단연 두려움 입니다. 걸음마도 말도 느렸다는 아이 때문에 걱정이 많다는 엄마 J는 또래들은 한글을 다 익혔는데 아직 글자에 관심이 없는 아이를 보면서 끊임없이 아이를 재촉했다고 합니다. 글자를 가르치며 자꾸만 화가나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대요. 자기 마음처럼 따라와주지 않는 아이를 보며 '쟤는 왜저렇게 느린거야' 답답했다는 거죠. 처음엔 단순히 내가 성격이 많이 급한가.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로 너무 소진이 되면서 '이렇게까지 답답해하고 아이를 몰아붙일 일인가' 싶어 고민을 해보았답니다.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아이에 대한 답답함이 '남들보다 뒤쳐져보이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J는 늘 남들보다 뒤쳐지는 게 너무 두려웠대요. 그 두려움의 아래에는 엄마가 있었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칭찬에 인색했던 어머니는 J에게 은근하게 친구 혹은 친언니와 비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J는 언니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할까봐, 또 엄마 지인의 자녀들보다 못나보일까봐 두려웠다고 해요. 엄마의 비교는 어느새 J씨에게 내면화 되어 매순간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포지션을 확인하고 있었던 거죠. 이제는 그 화살이 아이에게 가고 있었고요.


결국 J가 돌보아야 할 것은 불안, 그리고 남과의 비교 라는 키워드였습니다. J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아이가 자라는동안 성적, 대입, 취업 의 중요한 단계마다 자신의 두려움을 아이에게 돌리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불안으로 인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불필요한 채찍질과 비난을 하게될지도 몰라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괴롭힐거고요.



# 너는 나를 비추고, 나를 낮아지게 해


이처럼 아이와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걸리고 불편해지는 지점이 있다면 대부분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닐 거에요. 이미 가지고 있었으나 발화할 계기가 없었을 뿐이에요. 우리는 언제나 아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이해하고 살필 수 있는 거지요. 타인을 통해 나의 어떤 부분이 건드려질 때마다 "바보야 이게 바로 니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라는 목소리로 해석해 보면 좋겠습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성숙해지고 완벽해지지는 않으니까요. 수많은 관계 속에서, 특히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점검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이처럼 아이는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있습니다. 어떤면에서는 나를 낮아지게 해요.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나'만 중요하던 세상에서 나오게 합니다. 한 아이를 책임지는 꽤나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하지 않도록 항상 무언가를 알려줘요. 덕분에 끊임없이 나를 돌보고 채워갈 인간적인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어떤 날은 자꾸만 불안해지고 짜증이 올라오는 나를 보며 아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엄마, 그게 바로 엄마가 돌보아야 할 마음이에요."  라고요.


그러나 아이는 나의 내면을 비춰주는 것으로 제 몫을 다 한 것입니다. 그 것을 채우고 다듬고 어떤 부분은 회복해나가야 하는 것은 엄마들 스스로의 몫이겠지요. 육아는 때로 산넘어 산처럼 느껴지지만 나를 돌보고 성장시키는 큰 그림 안에서 아이를 마주한다면 어떨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생기게 되는 여러가지 심리적 위기를 조금은 더 지혜롭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쉬워진다는 건 아니고요.)


문득, 아이를 마주한 오늘 당신의 얼굴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우선 제 모습부터 잘 비추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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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5-07 23: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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