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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김혜령 ]


# 나인듯 내가 아닌 '아이'


아이가 아픈 것을 지켜봐야할 때만큼 괴로운 시간도 없습니다. 면역력이 충분이 키워지지 않은 영,유아기 시기에는 그 시간을 자주 마주하게 되지요. 지난 여름에 수족구를 앓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입안의 통증을 호소하며 엉엉 울던 아이, 또 이번 겨울 심한 독감을 앓으면서 고열로 힘없이 쳐져 있는 아이를 보는 시간이 저에겐 그랬어요. 먹지도 못하고 아픔이 공포스러운듯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 앞에서 지옥이 있다면 이런 거겠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는데도 아이가 나아지지 않을 때 (대부분은 시간이 약인 것들이죠.) 무력해지고, 지옥을 헤매요. 그러다가 아이가 잘 회복해서 다시 잘 먹고 잘자고 잘 노는 모습을 보면 깨닫습니다. 천국이 멀리있는 것이 아니구나. 아이가 건강하고 즐거운 게 곧 천국이구나 하고요.


신기하죠.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아이인데 내가 더 괴롭습니다. 나보다 더 나인 것처럼 아파요. 그러다가 아이가 건강해지면 내가 건강한 것보다 더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렇듯 아이를 키운다는 건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얻는 것인가봐요. 그런데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아이가 마치 나인듯한 느낌이 강해집니다. 아이가 곧 나 자신이 되어버리죠. 혹은 내 일부처럼 느껴져요. 탯줄을 자른 그 순간부터 아이와 나는 분리되어 있는게 분명하지만 엄마의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하나인 채로 살아가는 일이 많습니다. 아이와 밀착된 관계, 심리적 거리가 좁다 못해 지워져있는 상태인거죠.


아이와 나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있는 이러한 관계는 안타깝게도 건강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합니다. 개인을 개인으로 있지 못하게 하는 큰 원인이 되기 때문이에요. 짐작할 수 있듯 아이의 심리적 독립을 방해해서 후에 사춘기, 성인으로 커나가는 아이의 진정한 성장을 방해합니다. 또 시기적으로는 꽤 이후에 문제가 될 관계의 문제를 빼놓더라도, 무엇보다 엄마들 자신의 감정소모가 커지는 데에 큰 몫을 합니다. 괴로움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데요. 사실 나 하나 내가 통제하기도 어려운데, 1명의 몫이 늘어났으니 더욱 괴로운 건 당연한 겁니다. 아픈 것을 포함해서 아이가 내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일 때마다 감정적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진 관계


심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경우의 문제를 조금 더 들여다 봅시다. 타인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서로의 독립성이 깨져있는 상태를 융합관계*라고 합니다. 융합은 수많은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이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너무 사랑하면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이 커지잖아요.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것을 느끼고 싶어하죠. 그래서 뭐든지 함께하고 모든 것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그 둘은 서로간에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끼고 그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할거에요. 하지만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고유한 욕구가 있어요. 그런데 이 융합관계에서는 자신만의 생각, 감정, 욕구가 무시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지은과 종석은 캠퍼스 커플입니다. 첫눈에 반해 서로에게 푹 빠져버렸죠. 서로를 챙기고 보살피면서 마음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수업도 함께 듣고 주말에도 항상 함께했어요. 진로, 친구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소소한 생각들까지 공유합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같이 결정했어요. 똑같은 운동화를 신었고, 서로의 취향에 맞춘 헤어스타일을 했습니다. 2년여의 시간동안 한몸처럼 같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종석은 교환학생에 선정이 되어 1년동안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이 때부터 문제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지은은 너무 외롭고 공허해졌어요. 자신 없이도 잘 지내는 종석을 보면서 서운함과 왠지 모를 화가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종석의 어려움은 조금 달랐습니다. 지은이가 없는 일상에 적응해가며 스스로 뭔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항상 지은의 의견에 따랐고, 지은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조금씩 자신만의 취향을 찾고 선택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종석만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지은과는 크고작은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지은은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종석을 받아들이는게 낯설고 싫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20대에 경험했을 법한 꽤나 익숙한 스토리죠? 지은과 종석은 같은 생각, 감정, 욕구를 가진듯 한덩어리처럼 지냈지만 사실은 달랐던 겁니다.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강요하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상대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데에 익숙해져버렸던 것 뿐이죠. 하나에서 둘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이들처럼 우여곡절이 있을 수밖에요. 서로에게 강하게 의존하는 이 관계는 견고하게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엄마 사이에서도 많이 경험했을(그리고 경험중인) 이야기일 거에요. 엄마가 아이에게 자신의 욕구를 강요하는 상황은 얼마나 흔한가요. 융합관계에 익숙해진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욕구를 보지 못하고 '엄마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포커스가 맞춰져 엄마의 표정과 말투, 행동에 기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엄마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원한다고 착각하며 애쓰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여전히 그렇게 애쓰고 있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무감각할 수 있어요. 정신분석가이자 심리치료사 Perls는 융합관계가 유지된다면 개개의 정체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해요. 우리는 결코 같은 감정과 욕구를 가질 수 없는데,  상대와 같이 느끼고 생각해야 하니까요. 내가 나 자신을 고유한 존재로 확립시킬 수가 없는 것이죠.  즉, '나와 너'의 경계가 무너지면 내가 나답게 사는 것도, 아이가 아이답게 사는 것도 가로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계가 무너진 융합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기에는 나보다 더 나인듯한 느낌으로 시작되었지만, 아이가 성장해가면서 점차 엄마와 멀어지려고 할 때에도 좀처럼 거리를 허락하지 않잖아요. 그건 외로움이나 공허감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그 감정, 바로 '외로움' 아닌가요. 이 걸 마주하지 않으려고 타인을 자석처럼 마음에 붙이고 다니는 겁니다. 그렇기에 평소 외로움이나 공허감을 많이 느끼고 그 감정을 몹시 두려워하는 분들이라면 특히 유의해야 합니다. 마음의 빈 곳을 아이로부터 채우려고 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해요.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혹은 배우자에게 불충분하게 느끼는 사랑을 아이와의 관계에서 채우려고 하지는 않는지 살펴야 하죠.



# 타인과 안전거리 유지하기  - 아이는 미지의 세계


살아가면서 내가 누군지를 알고 이해하며,  자신의 결대로 살아가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물론 세상은 내멋대로 사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는 않지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고 씨앗이 가진 무한한 성장을 펼쳐보는 것. 그러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삶이 지닌 귀중한 기회죠. 내 안에서 아이를 타인으로 허락하지 않는다면 코스모스로 피어날 아이였는데 단지 엄마만을 위한 해바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백조로 커나갈 아이였는데 오리나 거위로 살아가는 일도 생기겠죠. 그러면서 엄마의 눈에는 정말 아름다운 해바라기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오리라고 감탄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몰라요.


나와 너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  아이와의 관계에서 평생 주의해야 할 부분이자, 모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조심해야할 부분이죠. 내가 모르는 훨씬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갈 아이에게 더더욱 중요할테고요. 아이가 타인과 경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원치 않게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면 너무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살피고 또 아이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심리적 역동을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건, 아이를 미지의 세계로 바라보는 태도에요. (모든 타인을 대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아이를 결코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죠. 매순간 새롭게 아이를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의 무수한 선입견, 오로지 내 삶에만 옳을 수 있는 그 관념들을 모두 내려놓고 아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무척 어려운 태도이지만 이 부분을 매일 노력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완벽한 엄마가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바로 아이를 아이답게 지켜주고 또 나를 지켜줄 게 분명해요.




# 나는 내 삶을, 너는 너의 삶을 피워내며


아이가 나보다 더 나같이 느껴지는 경험들은 참 소중합니다. 내 기쁨, 내 복지만 생각하던 작은 삶에서 한 단계 나아가 타인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라는 멋진 삶이지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평안과 행복을 빌어주는 그 시간은 분명히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어주고 있어요. 그럼에도 아이는 아이가 피워야 할 몫이 있고, 엄마도 아직 피우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거에요. 아이의 마음을 쥐고 있다면 둘중 그 누구의 것도 충분히 피워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기에 아이와 나 사이의 거리는 각자의 삶을 지켜주는 '안전'거리라고 할 수 있어요.


떠도는 얘기 중에 자녀를 가장 귀한 손님 대하듯 대하라는 말이 참 와닿았습니다. 나는 아이를 이 곳에 초대했고, 고맙게도 아이는 내 삶에 와주었어요. 오로지 엄마아빠의 초대로 내 인생에 와준 귀한 손님이 날개를 활짝펴서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것이라 착각하지 않고, 아이에게서 뒤로 한발짝 물러나 바라봐주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그럴 수 있다면 저는 또 제 인생을 잘 날아다닐 수 있겠지요. 


내가 나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만큼이나 아이가 아이답게 살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아이 삶의 조종자가 아닌 한결같은 안전한 배경이, 또 토양이 되어주고 싶어요. 언젠가 성인이 된 아이가 지칠 때 마음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꺼내쓸 수 있다면 참 기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도 아이를 보며 주문처럼 외워봅니다. ' 나는 나, 너는너.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그렇게 살아가자.' 


아마도 평생 노력해야할지도 모를 일이죠.



*융합관계 :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사람이 내면적으로 서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 게슈탈트 심리치료의 창시자 프리츠 펄스(Pritz Perls)가 만든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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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6-03 15: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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