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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오성욱 ]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오랜만에 B양을 만나 차 한 잔을 마셨다. 연애에 푹 빠져서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고 말하며 카페라테를 홀짝홀짝 마시는 B는 여전히 밝고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좀 전부터 내 눈에 뭔가 계속 거슬렸다. 시야에 은은한 보랏빛의 무언가가 걸렸다. 내 눈이 삐었나? 아니다. 힘겹게, 조심스럽게, 최대한 내 눈동자의 이동을 들키지 않게 훔쳐보았다. 멍 자국이었다. B의 가녀린 왼쪽 팔에 내 주먹만 한 시퍼런 멍 자국이 주먹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물어보고 싶었다. 어쩌다 생긴 멍 자국인지. 하지만 만약 B가 그것을 감추고 싶어 한다면? 아니다. 감추고 싶었다면 내가 보지 못하도록 노력했겠지. 물어보자. 아니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애써 잔잔한 상대의 마음을 긁는 일이 될 수도 있어. 주책 떨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자.


그러나 멍을 발견한 후로는 도저히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졸음운전하느라 집에 돌아온 길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멍이 생긴 이유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내가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니라면 참 좋겠지만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윌터 못지않게 내 상상은 줄곧 현실이 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에도 다른 종류의 멍이 물들고 있었다.


결국 걱정스러운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농담 툭 던지듯 물어보았다.


“너 술 먹고 자빠졌니?  무슨 멍이 그렇게 크게 들었어?  ㅋㅋㅋ”


B는 흠칫 놀라며 대답을 망설였다. 아니 망설이는 척은 하면서도 내가 멍에 대해 물어보길 기다린 것 같기도 했다.


이내 돌아온 대답은 내 상상과 일치함에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남친이 때렸어.”


아까는 눈을 의심했는데 이제는 귀를 의심했다. 당시 B양은 한 살 위 남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일상이 그 남자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은 멍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 내 눈앞의 멍은 첫 멍이 아닐뿐더러 놀랍게도 남친이라는 것이 B에게 폭력을 가하는 때는 화가 날 때가 아니라 그냥 심심할 때마다였던 것이었다. TV를 보다가도 갑자기 뒤통수를 때린 적이 있는데 B가 깜짝 놀라 왜 때리냐고 따지면 "심심해서"라거나 "왜 내 눈앞에 있어"라고 했단다. 딱히 서로 싸우다가 폭행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오늘의 멍은 어느 날 B가 만든 찌개가 맛없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이 정도면 보기 드문 미친놈 아닌가?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됐는데 이다음이 더 잘못되었다. 그런 정신병자랑 왜 여태 같이 살고 있냐는 내 질문에 B는 소름 끼치는 명대사를 양산했다.


“근데 잘해줄 땐 잘해줘ㅎㅎ”


ㅎㅎ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건 유행어에 가깝다. 남친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하소연하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왜 이럴까?


K-드라마의 영향으로 언젠가부터 나쁜 남자의 인기가 높다. 예전에는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건네며 “내 마음을 받아줘. 한 달 월급을 모아서 샀어.”가 통했다면, 지금은 준비한 선물을 휙 던지며 무심히 내뱉는 “오다 주웠다.”가 더 잘 통하기도 한다. 그래 뭐 이 정도는 받아들이기에 따라 매력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먹을 쓰고 집안 살림을 부수는 남자라면? 과연 그것도 우리가 말하는 나쁜 남자인 걸까?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는 그저 비교적 조금 불친절하고 무심한 척하는 사람쯤이지 데이트 폭력범을 일컫는 게 아니다. 데이트 폭력은 뉴스 등 매체에 심심치 않게 나오면서 이슈가 되고 있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는 것부터가 안타깝다. 


우리나라의 데이트 폭력에 관한 한 해 신고건수는 약 8천 건이나 된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경찰청 통계다. 신고하기를 꺼려하는 숨은 피해자들까지 합치면 훨씬 더 어마어마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중 폭력을 넘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람이 1주일에 1명 꼴이라고 발표된 바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은 왜 사전에 방어하거나 대처를 하지 못할까? 


연인 관계에서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 중 무려 50%는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한다. 폭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연인의 단 한 번의 애정 표현에서 더 큰 사랑을 느끼고 안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B가 말했던 "그래도 잘해줄 땐 잘해줘"심리다. 집안 살림을 깨부수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는 등 이 모든 것을 당하고도 피해자들은 ‘그래도 내 몸은 안 건드려.’라고 말하며 때 아닌 긍정마인드를 발산한다. 심지어 사랑의 힘으로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심리학에 나오는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설명할 수 있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서 6일간의 인질극이 일어났다. 다행히 잡혔던 4명의 인질은 모두 무사히 풀려나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인질범들이 잡혀서 재판을 받을 때 인질이었던 이들이 법정에 나서서 인질범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고 오히려 옹호발언을 했다. 인질들은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태에서 은행 강도들이 끝내 자신들을 해치지 않자 증오심 대신 인질범들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는 착각을 일으킨 것. 이것이 바로 스톡홀름 증후군이다.


데이트 폭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피해자의 심리는 이런 현상과 같다. 학교 다닐 때 맨날 혼내기만 하던 선생님의 단 한 번의 칭찬이 짜릿해서 여태 혼나 온 기억은 잊어버린 경험, 잘 안 웃던 아버지가 어쩌다 한번 웃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츤데레적 안도감이랄까.


어쩌다 한 번인 경우라면 괜찮을까? 아니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는 것쯤 가끔은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할 말은 없지만, SM 플레이어가 아니고서야 대체 누가 맞고 싶어 한단 말인가.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폭력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는다는 것이다. 맞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도 때릴 권리를 가진 사람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맞을 짓 했네."는 잘못을 했다는 의미이지 맞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힘이 센 사람이 맞을 짓을 했다고 한들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에게 아무 불만 없이 맞으려 할까? 달리는 예능프로그램 방송 중 호랑이가 기린을 때리는 장면은 볼 수 있어도 기린이 호랑이를 때리는 장면은 본 적이 없다. 폭력은 이유 불문하고 그저 강자만이 약자에게 기분에 따라 행하는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짓 중 한 가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전문가가 제안하는 데이트 폭력을 예방하거나 대처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구도 앞날을 예견하는 족집게 도사가 될 수는 없으나 위험을 감지할 지표는 필요하다.


1. 전화를 걸어서 건네는 가장 첫마디 – 지금 뭐해? 어디야? 


2. 인맥 차단, 옷차림 단속,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


3.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함.   


일단 일반화는 안 된다. 위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은 아주 많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매 순간 상대에게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의심 가는 행동을 한 적도 없는 데 일단 의심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의문을 품고 캐묻는다. 마치 그 의문이 제발 사실이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들은 데이트 폭력을 하나의 사랑 방식이라고 착각하는 중이다. 잘못되었음을 알려주어도 깨닫지 못한다. 사랑의 힘으로 바꿔보겠다고? 연인에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 사랑의 힘을 알아주기나 할까? 지금 그 사람과 나누고 있는 그것이 사랑이긴 한 것일까? 


사람 속을 알기란 앞날을 예측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피해를 예상하고 서둘러 헤어지려는 과정에서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도 빈번한데, 망설이지 말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두 번은 안 그럴 거라는 허무한 믿음, 어쩌면 곧 바뀔 수도 있을 거라는 반복적인 기대심리에 피해를 입더라도 내 사람을 숨기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은 기가 막히는 감정. 누가 누구를 보호해주나? 피해자에게는 치유 불가능한 후유증이 남을 수 있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게 되며 심한 경우 도피를 위해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그만두기도 한다.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반드시 도움을 청해야 한다.


이쯤 해서 우리가 잊어버린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누가 벗길 수 있는지 내기를 하는 해와 바람의 이야기다. 알다시피 나그네의 옷은 강력한 바람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따사로운 햇빛에 의해 자연스럽게 벗겨진다.


남탕에서는 로션을 바를 때 촵촵 소리가 나게 뺨을 때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피부에 잘 스며들길 바라는 행동일 텐데 사실 로션은 피부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발라야 훨씬 더 잘 스며든다.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다면 거친 말과 위협적인 행동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B는 며칠 뒤 내 도움을 받아 범죄자의 집구석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당장 안 들어오면 죽여 버리겠다고 여러 차례 협박한 그놈의 문자와 전화음성 녹음, B의 몸에 남은 폭행 흔적들은 차곡차곡 모아서 경찰서에 제출했다.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현재 그녀는 다른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천사 같은 아이 둘 낳고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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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7-23 19: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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