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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윤서정 ]


최근 한국 사회 속 가장 지배적인 정서를 꼽자면 그건 바로 ‘무력감’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마주친 참사들이 충분한 애도와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잊혀져가는 걸 목격했고, 사회를 지배하는 견고한 계급의 문제가 변화하지 않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사회의 문제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그 때 파생되는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일 여유 없이 무력감을 겪게 된다. 그러나 무기력한 채 일상을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생동감 있는 삶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일상의 회복을 위해 큰 용기를 내야 한다. 또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 옆에 있는 타인의 실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연대를 통한 심리적인 안정감은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의 첫 단계임이 분명하다.

 


'피라미드 게임'이 그리는 무력감의 정서


이러한 맥락에서 올해 ott를 통해 방영된 <피라미드 게임>(2024)은 견고한 계급 질서를 은유하는 ‘피라미드’의 이미지를 전면에 등장시켜 우리 사회 구조에 대한 무력감과 그것을 청소년들이 어떻게 내면화하는지, 또 연대를 통해 변화를 모색하는지에 대해 직관적으로 다룬다. 


달꼬냑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인기 투표를 통해 학생들의 등급을 매기고 ‘왕따’를 정하는 ‘피라미드 게임’이 메인 테마다. 피라미드 게임이 진행되는 백연여고 2-5반에 주인공 성수지가 전학을 오게 된다. 그는 군인 아버지의 잦은 근무지 이동으로 인해 전학을 자주 다녔고 그 덕에 친화력과 사교성을 영리하게 ‘사용’할 줄 안다. 그러나 백연여고 2-5반은 이전까지 경험했던 학급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수지는 반강제로 참여하게 된 피라미드 게임에 의문을 품으며 게임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야기 속에서 그려지는 ‘금수저’ 캐릭터들의 행태와 이에 맞서는 주인공의 대결은 그 자체로는 비현실적이고 유치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피라미드 게임>은 정의로운 주인공과 악한 인물들의 대결, 갈등 구도보다는 방관자와 소극적인 동조자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심리를 조명함으로써 드라마에 몰입감과 현실성을 부여한다. 심리적인 부분에서의 리얼리즘은 <피라미드 게임>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BBC는 <피라미드 게임>을 ‘새로운 오징어 게임’이라고 언급하며 두 작품 다 한국인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엿보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드라마 '피라미드 게임' 스틸컷. TVING 제공


다시 연대를 꿈꿀 수 있을까


드라마는 폭력적인 구조 속에 놓여 있는 등장인물들이 무력감과 실의에만 빠진 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성수지를 중심으로 무력감에서 벗어나 사회적 변화를 모색할 이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10대 ‘소녀’ 주인공이 등장해 소녀들의 관계성, 심리를 통해 전개를 풀어가는 극답게 다양한 인간군상을 표상하는 소녀 캐릭터들의 유대와 적대의 과정을 보여주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환대하는 방식으로 ‘피라미드’를 깨부수려 한다. 


피라미드 게임의 주동자이자 주인공에 가장 대비되는 인물인 백하린이 어린 시절 친구였던 명자은을 다시 만난 뒤 복수심에 휩싸이는 것, 성수지와 명자은이 좋은 친구 관계로 유대를 쌓는 장면 등은 피라미드 게임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학생들 간의 연대'라는 이상적인 방식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약자로 인식되는 10대 청소년들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는 대안적 가능성으로 보이게끔 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아무것도 손에 쥐고 확신할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가장 기초적인 버팀목은 바로 ‘자긍심’이 아닐까? 자긍심은 개인적인 존엄과 직결되는 것이라 타인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긍심 또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관심, 무기력, 무력감이라는 불신과 체념의 감정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수록 인간은 좀처럼 타인에게 관심을 갖기 어려워지고 고립되기 마련이다. 무력감, 냉소, 고립, 그리고 다시 무력감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피라미드 게임> 속 2-5반이 보여준 타인에 대한 환대와 아픔을 겪는 사람들과의 연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1) '피라미드 게임'의 성공…신인들의 반전+학폭 경각심까지, 일냈다 [엑's 이슈], 엑스포츠뉴스, 2024년 3월22일

2) 전지니, (2023), 소녀들의 서바이벌 게임과 학원물 웹툰의 진화-<피라미드 게임>, <도플갱어의 게임>을 중심으로-, 국제어문 제96집, 539-5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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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8-22 06: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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