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진우
[한국심리학신문=채진우 ]
크립토메네시아(Cryptomnesia)는 인간의 기억에서 발생하는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로, 본인이 과거에 경험했거나 학습한 기억을 망각한 채 이를 새로운 아이디어나 영감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즉,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그것이 기존에 존재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이 고의로 표절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억의 오류로 인해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크립토메네시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심령 연구가 스테인트 모세스(Stainton Moses)는 한 영매(靈媒, medium)로서 세시언스를 진행하던 중, 인도의 두 형제와 영적으로 교감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그가 단순히 신문에서 읽었던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크립토메네시아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 개념은 이후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테오도르 플루르노이(Théodore Flournoy)에 의해 명명되었으며,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도 그의 논문 "소위 초자연적 현상의 심리학과 병리학"(1902)과 "크립토메네시아"(1905)에서 이를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융은 특히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크립토메네시아의 사례를 발견하기도 했다.
크립토메네시아에 대한 최초의 실증 연구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특정 범주의 예를 제시하게 한 후, 나중에 새로운 예를 떠올리도록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연구 결과, 참가자들은 약 3~9%의 확률로 다른 사람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자신이 직접 생각해낸 것으로 잘못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사한 효과는 단어 검색 퍼즐이나 브레인스토밍 세션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됐다.
연구에 따르면, 크립토메네시아는 기억의 출처를 정확히 추적하는 능력이 저하될 때 더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높은 인지 부하 상태에서 특정 아이디어를 접하면 그 아이디어의 출처를 명확히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같은 성별의 사람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도 확인됐다.
1.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50여 년 전 출판된 책의 특정 구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니체의 누이는 그가 어린 시절 해당 책을 읽었음을 인정했으며, 이는 크립토메네시아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2. 조지 바이런과 괴테: 바이런의 희곡 맨프레드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괴테는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바이런은 해당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3. 헬렌 켈러: 그녀가 집필한 The Frost King은 마거릿 캔비(Margaret Canby)의 동화 The Frost Fairies와 내용이 매우 유사했다. 헬렌 켈러는 해당 동화를 4년 전에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를 기억하지 못한 채 새로운 창작물로 인식했던 것이다.
4. J.M. 배리: 피터 팬에서 피터가 그림자를 붙인 후 스스로 "내가 정말 영리해!"라고 자랑하는 장면은 크립토메네시아 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배리는 피터의 행동을 단순한 자기중심적 성격이 아니라, 기억 장애의 일종으로 묘사했다.
음악계에서도 크립토메네시아 현상은 종종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의 유명한 곡 Jerusalem of Gold는 바스크 지방의 자장가 Pello Joxepe와 멜로디가 유사하다. 작곡가 나오미 셰머(Naomi Shemer)는 후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크립토메네시아는 창작과 표절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창작자에게 윤리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무의식적인 기억의 작용을 고려할 때, 창작자들은 자신이 접한 정보의 출처를 철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크립토메네시아의 발생 가능성을 줄이는 전략이 개발될 수 있으며, 이는 창의성과 지적 재산권 보호 측면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크립토메네시아는 단순한 기억 오류를 넘어, 우리의 창작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요소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심리적 현상이다. 따라서 이를 단순한 실수로 치부하기보다는, 창의적 사고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문헌
1. Alan S. Brown., and Dana R. M., (1989). Cryptomnesia: Delineating Inadvertent Plagiarism,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Learning, Memory, and Cognition 1989, Vol. 15, No. 3,432-442. Retrieved from: https://warwick.ac.uk/fac/sci/psych/people/fsch/fsch/studentresources/3rdyearprojects/projects/plag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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