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새벽 세 시 반.
마을은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도윤의 집 마당엔 불이 켜져 있었다.
방 안엔 쌀밥과 계란, 김치, 그리고 조용한 어머니의 눈빛이 있었다.
말없이 밥을 뜨던 도윤은, 문득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머니, 전 괜찮아요.”
그 한마디에 어머니는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어머니의 눈가엔 벌써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래야지. 아무 일 없을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스스로에게도, 아들에게도 하는 주문 같은 말이었다.
도윤은 작게 웃으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밥맛은 없었다.
목구멍은 꽉 막힌 듯했고, 가슴은 시멘트처럼 무거웠다.
네 시가 되자, 마을 입구로 향했다.
비는 그쳤고, 안개가 깔려 있었다.
짙은 회색의 안개 속, 군용 트럭이 조용히 도착했다.
이미 몇 명의 젊은이들이 타고 있었다.
같은 마을의 세진도 그중 하나였다.
“도윤아!”
세진이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 표정엔 어색한 긴장감이 스며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의 인사를 나눈 뒤,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다.
차는 곧 출발했다.
달리는 트럭 안은 바람소리와 함께 어정쩡한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표정을 훔쳐볼 뿐이었다.
“어때, 떨리냐?”
세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도윤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떨려. 이상하게. 진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
“야, 설마. 그냥 겁주려고 저러는 거지. 며칠 훈련만 하고 끝날걸.”
세진은 웃었지만, 눈웃음은 번지지 않았다.
도윤은 그 웃음이 방어기제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속여야 안심할 수 있는 웃음.
그날 오전,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모두 군복을 입고, 철모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어색한 신병의 행렬은 낡은 객차를 가득 채웠다.
기차는 북으로 향했다.
강원도 모처의 훈련소로 향하는 군용 열차였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이 낯설었다.
도윤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문득 열차 한쪽에서 낮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앞좌석의 병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울고 있었다.
그 옆의 다른 병사들은 애써 못 본 척하며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위로하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울음은 조용히, 그러나 길게 이어졌다.
“도윤아, 너는 사람을 죽일 수 있겠냐?”
세진이 작게 물었다.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답이 없었다.
죽이는 것과 살아남는 것 사이의 경계는, 아직 그에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난 모르겠어. 만약 그럴 일이 생기면… 그냥 눈 감고 쏠 거 같아.”
세진의 말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해였다.
그 이상을 말하기엔, 말이란 게 너무 무력했다.
기차는 북쪽으로 계속 달렸다.
창밖엔 시골 풍경이 계속 이어졌고,
점점 더 초록빛 대신 군청색과 회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도윤은 철모를 무릎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감쌌다.
철모는 묵직했다.
마치 그 안에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이름, 목숨, 그리고 아직 만나지 않은 적의 얼굴.
도윤은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그 생각은 비명처럼 속삭였고,
열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작가의 말 :
2화에서는 주인공 도윤이 전쟁터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전장의 첫 관문은 언제나 '침묵'과 '모호한 불안'으로 시작되곤 하죠.
다음 화에서는 훈련소에 도착한 도윤과, 그곳에서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가 마주하게 될 전우, 명령, 그리고 첫 번째 죽음.
《이름 없는 전쟁》은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의 심연으로 들어갑니다.
함께 걸어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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