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남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선안남 ]
1.
다른 작가님의 이름으로
강의와 칼럼 의뢰가 잘못 온 적이 있었다.
“정 ㅇㅇ작가님께,
우리 기관에 강의를 오셨으면 합니다.”
“정 ㅇㅁ작가님께,
칼럼 의뢰를 드립니다.”
같은 일이 두 번쯤 반복되자 알게 되었다.
내가 대타라는 것을.
정 작가님은 국문학을 하셨지만 심리학에 해박하신 분, 인기가 많고 바쁘시기에 정 작가님께 사정이 있어서 하지 못 하는 일들이 나에게 오는 것 같았다. 전에는 몰랐던 이런 흐름이 잘못 온 메일과 문자 메시지로, 선명하게 보였다.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셨기에, 어떤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분들의 일을 물려받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어서 신기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참 멀었구나, 싶었다.
내 능력과 경험치의 한계를 느꼈다.
나만 부를 수 있는 노래,
꼭 나여야만 되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대타였다.
2.
하지만 또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언제 대타가 아니었던 적이 있는가?"
"앞으로도 대타가 아닐 시간이 올까?"
세상에는 꼭 나 아니어도 되는 일 천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무엇을 얼마나 잘해도,
우리는 대체 불가능하지 않다.
어떤 일을 나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다.
그럼에도 이 질문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왜 꼭 나여야 하는가?
내가 왜 꼭 그 일을 해야 하는가?
둘 중 하나의 질문에 동하는 마음이 있어야
일을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의 노래를 대신해서 부르더라도
그 노래도 역시
나만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불러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온통 나이므로,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해도
결국 나로서 대신하므로.
대타인가 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내 노래를 하고 있는가' 인 것 같았다.
3.
언젠가 강연 프로그램을 짜는 일을 하면서
연사님들을 섭외해야 될 때가 있었다.
성폭력 관련 강연이었던 지라
경찰청에서 연사님이 오셨는데,
그분은 그날 강의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선배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부탁을 받고 나오신 것이었다.
그 강연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작하시면서 하셨던 이야기는 기억난다.
내 맘대로 살을 붙여본다.
“그러니까 여러분,
제가 오늘 대타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은 대타가
홈런을 치기도 하지요.
이런 일이 드물기는 하나,
없지는 않은 일일 겁니다.
그리고 그 대타가 치는 홈런이
아주아주 드물게는 만루홈런이 되기도 하니,
저도 오늘 꿈을 꿔보겠습니다.
현실성과 확률 면에서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꿈은 넉넉히 잡아보겠습니다.
오늘은 대타가 홈런을 치는 날로요"
4.
대부분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자리는 대타의 자리다.
삶은 우리에게 확답을 주지 않고
언제나 기다리라 준비하라, 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차하면 투입될 수도 있으니
기다리며 준비한다.
지금 무대에 서서 자신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동경하며 손뼉 치며,
그들의 노래를 따라 하며
그러면서도
나만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무엇인지 고심하며,
때론 만반의 준비하고도
무대에 서지 못하는 나날들을 지나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꿈꾸며 준비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그러다 보면 어느덧
유일무이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
나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어있겠지.
오늘도 대타의 시간을 지나며
안 써지는 내 노래를 갈고닦는다.
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같이 부르기 위해,
대타가 홈런을 치는 것을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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