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예솔 추예솔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추예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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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쩔 티비, 안물 티비, 크크루삥뽕” 신혜선 배우가 SNL에서 사용한 신조어의 행렬은 유튜브를 포함해 각종 SNS에서 퍼지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는 무엇이든 빠르게 이루어지는 MZ 세대의 흐름에 맞게 금세 우리 집 식탁으로도 번졌다. 부모님이 “어쩔 티비”(‘어쩌라고 가서 티비나 봐’라는 뜻의 신조어)를 적재적소에 사용하자 어쩐지 웃음이 터졌다. 특히 엄마는 ‘아싸가 될 수는 없다’며 초등학교 6학년생인 사촌 동생에게 최근의 유행어를 묻는 등 ‘인싸 문화’를 섭렵하려고까지 했다. 단순히 ‘유행어를 아냐 모르냐’와 같은 사소해 보이는 기준에 따라 ‘인싸’와 ‘아싸’를 구분 짓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이 인싸의 대열에 올라타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기성세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볍게만 보이는 이 현상의 이면에 깊은 사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어떨까.
인권과 평등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그런데 ‘인싸’와 ‘아싸’라는 분류법의 등장은 ‘평등’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는 것과는 일견 상반된다. 혹자는 단순한 ‘밈’(SNS 등에서 유행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복제되는 짤방 혹은 패러디물을 이르는 말)에 지나지 않는 이 현상이 어떻게 ‘평등과 차별’ 따위의 무거운 주제에 비견될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대두된 이래로, 은연중에 스스로 검열의 과정을 거칠 때가 잦아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지금 이 행동을 하는 것은 ‘아싸’로 비칠 만 한 일인가, 아닌가. 그러면서 때로는 단순한 취향을 말할 때조차 머뭇거려지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는 ‘재미 삼아’ 유머로 소비하는 그 분류법의 기저에, 동일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어 보는 다소 기이하고 오만한 시선이 자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 현상을 가볍게만 넘길 수 있을까?
사람을 유형화하는 이유와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점
‘인싸’와 ‘아싸’로 치환되는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법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특정 집단에 따라 요구되는 행동 양식 및 양상도 상이하다. 그래도 통용되는 ‘성격적 특성’을 기준으로 삼아본다면, 대개 활발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 ‘인싸’로, 소극적이고 조용하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 ‘아싸’로 구분하곤 한다. 이렇게 손쉬운 방법을 통해 사람을 분류하는 것은 ‘아포페니아 현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포페니아 현상’은 ‘주변 현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 사고의 특징’을 이르는 심리학적 용어다. 요컨대 사람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억측함으로써 안정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구분법을 활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실인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자신의 심리적 안정감과 쾌감만을 위해 거행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한 가지의 오류가 더 있는데, 성격의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특성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생물적으로 주어지는 ‘기질’이 있는 것은 맞으나, 이는 결코 고정적이지 않으며 환경에 따라서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구분은 이러한 특성을 일거에 부정하고 사람을 평면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문제다. 그런데도 위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과몰입하며 비주류에 속한 아싸를 희화화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류가 비주류를 희화화하는 심리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는 사람이 ‘더 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불편을 제기한다. 필자 역시 아싸의 진열에서 인싸의 대열에 들어서려고 노력하다가 자괴감을 느끼면서 사회를 돌아보게 됐으니 말이다. 반대로 인싸 즉, ‘주류’에 속한 이들의 경우는 어떨까. 물론 주류 역시 불공정함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주류에 속한 이들은 대개 ‘다수’이고, 다수는 단순히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이유만으로 ‘옳은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더라도 당장 불합리한 상황을 겪지 않는다. 오히려 뭐가 불평등하냐고 주장하며 ‘비주류’에 속한 이들을 매도한다면,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경계가 공고해지면서 본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더욱 강해진다.
그런 점에서 인싸가 아싸를 희화화하는 것은 철저히 비주류에 속한 이들을 본인과는 다른 열등한 집단으로 분류하고 타자화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들과의 구분을 통해 본인들이 속한 자리의 입지가 단단하고 안온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쾌감을 얻으려는 심리가 기저에 있다. 이러한 상황이 잔인한 이유는 조롱을 개그로 승화시키고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면서 암묵적으로 차별을 종용하는 분위기가 쉽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여 비주류가 불합리함을 주장한다면 ‘농담인데 왜 예민하게 굴고 그러냐’고 도리어 나무랄 수 있는 것이다.
비주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 (1) - ‘고정관념 압박’ 때문
누군가는 비주류에 속한 것이 그렇게 싫다면 주류가 되려고 ‘노력’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은 비주류를 존중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혐오’에 속하기에, 발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제다. (‘혐오’는 단순히 무언가를 싫어하는 감정뿐만 아니라, 그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지 않고 특정 프레임 안에 가두어 고착화하는 경우도 두루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고사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비주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심리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사회에서 이미 ‘아싸는 어떻더라’라고 규정한 사실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죄는 매듭’처럼 자신을 압박하고 그 안에 갇히게 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를 ‘고정관념 압박’이라고 한다. 반면 그렇지 않은 대상은 이미 사회적으로 신의와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부담감과 압박이 낮아져 더욱 그 안에서 안정적으로 무언가를 잘 수행하게 되는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차이가 재생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이다.
비주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2) -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강조되는 능력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
그렇게 아싸를 탈피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누군가는 노력 부족을 탓할 것이다. ‘네가 자발적으로 나오려 한 것’이므로, 거기서 다시금 소외되고 도태되는 것 역시 ‘네 잘못’이라며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의 사회 분위기를 살폈을 때, 이는 무책임하고 안일한 발언임이 분명하다.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을 우선시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디폴트 값으로 설정되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상황이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노동의 과정에서 고통을 느끼더라도 성공적인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자기 착취를 반복하고, 혹여 도태된다고 할지라도 개인은 자신을 탓하게 된다. 이를 다시 개인이 주류에 속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상황에 대입해보자. 주류에 속하려는 노력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므로 사회는 개인에게서 책임을 묻는다. 그 과정에서, 궁극적으로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사회적 분위기가 핵심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자신의 역량 부족을 탓하며 자신만을 문제 삼는 게토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위 발언은 이러한 문제를 간과했다.
이를 요즘 유행하는 ‘넷플릭스’나 ‘MBTI’와도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인터넷을 보다가, 친구들 사이에서 넷플릭스를 주제로 얘기할 때 동참하지 않으면 소외될까 봐 졸지에 어떤 드라마를 정주행까지 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접한 적이 있다. MBTI 역시 화두에 올리는 주변 사람들이 많다 보니 관심이 없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찾아보는 경우가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반응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비평한 안시환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라고 정의했다. 요컨대 본인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시대의 유행에 편승하고 주류에 속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며
누군가는 인싸와 아싸와 같은 신조어로 가볍게 농담으로 시작한 데서 이러한 병리적 현상까지 읽어내는 것은 비약이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싸와 아싸‘로 집약되는, ‘다수와 소수’ 내지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고 차별하는 사회의 모든 현상 전반을 지적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회 전반의 문제로 비화시켰을 때 '단순해' 보이는 이 현상은 기실 단순하다고 여길 수만은 없다. 더불어 ‘불편하다’는 감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도 위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감정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행동을 만든다는 점에서 봤을 때, ‘변화’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지 모를 이 작은 감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러한 분석이 과도하다기보다, 오히려 '인싸의 문화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은 과도하다’는 반응 쪽이 과도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한 주장은 누군가의 생각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변방으로 밀어 넣는다는 점에서, 필자가 위에서 말한 ‘차별을 더욱 공고히 하는 주장’이기도 하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핵심 문제는 인싸의 부류를 신격화하고 아싸 부류를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어쩐지 인싸에 귀속돼야만 한다는 모종의 압박을 부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다양성을 존중하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사회가 빠르게 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않고, 그래야만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속한 이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외치는 ‘인싸와 아싸’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돌아보고 재고하려는 시도는 한 번쯤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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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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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환, <오징어 게임>으로 생각해본 ‘구독형 OTT 플랫폼에서 상업적인 흥행의 주체는 누구인가’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8720
위근우, 「과도한 PC함이라는 허수아비」,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 시대의창, 2019.05.20.
‘어쩔 티비’와 ‘밈’ 용어 정의 - ‘나무위키’와 ‘네이버 오픈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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