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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나에게 주고 싶은 선물 - 쓸모에 닿지 않아 더 큰 구원이 된 어떤 것에 대해
  • 기사등록 2022-08-08 07: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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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선안남 ]


서른 중반의 문정씨(* 문정씨는 한 사람이 아니라 제가 상담실에서 만나온 여러 사람, 여러 마음, 그리고 결국 우리 모두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는 어린 시절이 불행이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고

("몇살 때 돌아가셨는지는 모르지만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고 사진조차 없어요. 사실 그렇게 그립다는 것도 잘 모르겠어요."), 

아빠가 새엄마와 결혼을 할 때까지 고모집들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살았다

("생존은 하게 해주셨으니까 감사하다고 해야되겠지요? 딱히 잘해주시는 분도 못해주시는 분도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셨어요. 특별한 기억이 없어요").


10살 무렵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집에 없었고 새엄마는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회초리로 매질을 했고 집안일을 호되게 시켰다. 결벽증이 있었는지 온 집안을 쓸고 닦는데 열을 올렸다.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 하우스인것처럼, 사람의 흔적을 감추는 게 목표인 사람처럼요.")


문정씨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설거지를 해놓고 거실을 치워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며 되도록 시간을 보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숨을 죽이고 목소리를 내지 않고 얼굴을 내밀지 않아야했다. 그렇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게 없는 듯이 사는 것이 그녀가 그 집에서 아이로 살아가는 생존 방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회초리가 아닌 주먹으로 맞았다. 맞아서 아픈 것보다 눈두덩이가 새파랗게 된 것이 무서웠다. 새엄마는 그녀에게 방에 가서 꼼짝 말고 나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올 시간이 다가오며 그녀는 처음으로 어떤 결심을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라는 대로 숨죽이며 살았던 그녀로써는 큰 결심이었다. 아빠에게 얼굴을 보이기로 했다. 그렇게 새엄마의 만행을 아빠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 동안은 제대로 몰라서 그랬더라도 아빠가 보시면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시겠지, 그래도 아빤데, 그래도.. 그래도...")


현관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아빠에게 다가가 얼굴을 꼿꼿이 들고 서 있었다. 아빠는 그녀를 보시더니 아주 잠깐 눈빛이 흔들렸을 뿐, 바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눈에 멍이 들어있는 것을 보셨을 텐데, 바로 고개를 돌렸지요. 고개를 돌리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지요").


아빠가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물어야 했을 질문, 해야 했을 말을 해주지 않은 그 순간이,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있던 문이 닫히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끈이 끊기고, 위태롭게 내딛고 있던 땅이 꺼지고, 세상의 모든 빛이 어둠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다시 어둠의 방으로 끌려들어갔다. 벌이었다. 그날은 소리 뿐 아니라 방에 불을 켜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창문으로 어른거리는 바깥의 가로등 불빛을 지켜보며 긴 밤을 보냈다. 밤은 길었고 길고긴 어둠 끝에 새벽이왔고 그렇게 아침이오고 해가 나와도 그녀의 마음에는 햇살이 닿지 못했다.

아빠와 새엄마는 얼마 안가 이혼을 했고 그나마 그녀에게 있던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깨지자 그녀는 일찍 가장이되었다. 그 후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시켜 스스로를 일구어나가는 힘으로, 현실을 적확하게 판단해내는 능력으로 살아왔다. 너무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이 그녀에게 생존이었다.


그날의 일은 산산조각난 유리조각들이 닮거나 닮지 않은 모습으로 이곳저곳에 무수히 흩어지듯, 그대로 잊혀졌다. 특별히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도 무심하고 눈길을 주지 않던 아빠가 단지 고개를 돌렸을 뿐, 그것은 예전부터 계속 되는 일이었다며 별일 아니라 여겼다.

그런데 강물, 갯물, 냇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로 향하듯, 어느 순간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를 우리가 가장 상처받았던 그 지점으로 우리를 다시금 되돌려 놓는다. 우리 마음은 언제고 가장 마음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던 순간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 것. 결국 그녀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자신을 이야기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내내 담담하게 관리되던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하염없이, 고였다가 흘러내리는 마음의 강둑이 무너지는 그런 눈물이었다. 그저 계속 내리던 비가 내리듯 줄기줄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참 뒤 눈물이 잦아 들고 눈물과 함께 꺼내놓은 말들의 여운이 공기 중에서 천천히 산란되어가는 것을 느낄 무렵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였던 문정씨가 어떤 시간을 견뎌야 했을지

어떤 시간을 돌아돌아 지금 여기에 앉아 이제야 눈물을 흘리기에 이르렀는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아 마음이 먹먹하네요.


그 때 창문 너머로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그 때 문정씨에겐  아무도 없었네요.

정말 아무도 없었네요.


내게 아무도 없었던 그 시간 속의 슬픔이

그리고 지금 여기에, 내 마음 속에 계속 살아있네요."


"지금은 괜찮아요 다 지나간 일인 걸요."


그녀는 이미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너무 빨리 돌아올 수밖에 없이 시간의 재촉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그래야 살수 있었기에, 눈물도 서둘러 닦고 있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 가장 듣고 싶었던 말로부터 재빨리 도망쳐 나가고 있었다. 상담을 마칠 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더 머물러 보자고 붙잡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하나의 질문을 덧붙였었다.


"문정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어요.

지금은 괜찮아진 내가 과거의 힘들었던 나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다면


나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큰 상처를 안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주 하게 되는 질문이었다. 상처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은, 특히 그 상처가 일상이었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가혹한 경우가 많아서 이런 질문이 필요했다.


그녀는 이 질문을 혼란스러워했다. 언제나처럼 정확한 답, 현명한 답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따로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분명 생각보다 내가 나에게 뒤늦게라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그날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며칠 뒤 그녀가 바비 인형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런 피규어 모으는 사람들을 혐오하기 까지 했는데, 어떤 효율적인 목적 달성 성과가 없는 활동들을 하며 특히 돈을 쓰는 사람들을 보며 갑갑했는데, 그냥 세상에 아무 쓸모 없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특히나 마음을 담은 모든 것에는 겉으로 보이는 쓸모를 넘어선 어떤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더라는 말도 했다.


"선생님, 그 아이에게 인형을 줄거에요.

아무도 없어도

너무 외로울 땐 인형을 쓰다듬으며 너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라고, 안아주라고

인형을 창문 너머로 던져줄거에요.


방이 어두워도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정씨가 문정씨에게 인형을 선물하는 상상을 했다.


아빠가 고개를 돌렸어도, 세상이 고개를 돌렸어도, 그래서 괜찮지 않다고 해도, 결코 괜찮을 수 없다고 해도, 너는 자라고 자라서 너무나 잘 자라주어서 지금의 너 자신을 위로해줄 수도 있을 만큼 잘 클것이고 잘 가고 있다고,


너가 너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는 상상을 했다.




오늘 아침 문정씨의 말이 생각났다.

장난감을 잃어버렸다고 악을 쓰는 아이를 보며 

고개를 돌리며 그게 뭐라고, 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아이의 눈에 그렁그렁 어떤 갈망이 맺혀 있었다.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갈망과 원함, 기다림과 간절함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작고 사소하고 별 것아닌 것에라도 

마음이 담기면, 마음을  담을 수만 있다면

감히 그 누구도 쓸모를 논할 수 없다는 것도 생각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서 결국, 

아이가 아니라 내가 구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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