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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신치 ]


1999년 여름


학교를 마치고 도서관에 가기 위해 8차선 대로변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오토바이 한 대가 나를 지나쳐 50미터쯤 가다가 되돌아와서 내 뒤로 가더니 다시 내 쪽으로 향해 왔다. 내게 어딘가로 가는 길이 이 길이 맞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앞서 가지 않고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나란히 가고 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오토바이 쪽을 쳐다봤다. 여름이라 남자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 안에 있어야 할 몹쓸 물건을 밖으로 꺼내 놓고 있었다. 나는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고 아무 말 없이 빨리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그 미친놈은 나보다 앞질러 갔다.


2000년 여름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국어 선생님이던 1학년 때 담임을 찾아 고등학교 3학년 별관에 따로 있던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 중간에 있는 넓은 나무 책상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선생은 내게 물었다.


“남자 친구랑은 잘 지내고 있고?”

“네, 잘 지내고 있어요.”

“키스는 해 봤어?”

……



“이리 와봐. 내가 키스하는 법 알려줄게.’

……


나는 또 얼음. 바로 도서관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 도망쳤고, 남은 1년 반동안의 고등학교 생활 내내 변태 선생을 피해다녀야 했다.


2003년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나는 고등학교 선생에게 당한 일을 처음 입 밖으로 꺼내기로 결심했다.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 정도 일로 참여해도 되는 걸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하고 스스로 여러번 되묻기도 했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씩 생각나는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게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


2018년 가을

용기 있는 여자들의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도 잊고 있던 고등학교 선생에 대한 기억이 다시 소환되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학교 이름과 선생의 이름을 넣고 검색을 해봤다. 그는 장학사까지 한 뒤에 잘 지내고 있는 듯 보였다. 더 이상 이런 기억들이 나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도 없다. 하지만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누구도 내게 ‘미안하다’고 얘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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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8-09 14: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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