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The Psychology Times=정세영 ]
출처: unsplash.com
“장녀 건들지 마. 눈빛이 차분하다고 얌전한 게 아니라 차분하게 돌아 있는 것뿐이야. 크레이지아시안걸 중에서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야.” 2019년, SNS를 통해 유명해진 이 문구는 어떤 분야든지 한국을 뜻하는 K를 갖다 붙이는 한국인들이 'K-장녀'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내게 했다. 친동생이 두 명이나 있고 외가와 친가에서도 장녀인 나는 이 수식어가 반갑기도 했고, 인터넷에서 말하는 수식어의 프레임이 내 삶에 적용된 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 칼럼을 통해 나의 경험과 감정을 돌아보며 이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을 솔직하게 공유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게 K-장녀라고?
인터넷에 'K-장녀'라는 세 글자를 검색해보니 그들이 부여받는 여러 의무와 역할에 대해 알아볼수 있었다. 장녀는 동생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의 정서적 공감자 역할과 책임감 있는 예비 어른의 모습을 강요받는다. 즉, “네가 똑똑하니 동생이 아니라 너한테 이야기하는거야”라며 가족의 고민을 듣고 서로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네가 잘해야 동생들도 따라서 잘하는거야”라는 이유로 동생의 본보기가 되어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에 많은 장녀가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결론을 보자,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서의 나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이 K-장녀의 역할에 해당이 될까? 라는 질문에 나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장녀라는 위치가 오히려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에 부정적인 면을 많이 포함한이 수식어가 나에게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장녀가 부담스럽다고 손꼽는 정서적 공감자 역할을 오히려 가족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할 기회라고 여긴다. 주로 엄마는 사춘기 동생과 갈등을 경험하면 아빠에게는 하지 않는 이야기를 나에게 쉽게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엄마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으며 동생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다. 이후, 나는 동생과도 따로 대화를 나누며 엄마의 바람을 슬쩍 전달해주어 서로 간의 갈등이 해소될 수 있도록 한다. 이 중재자 역할은 내가 가족 구성원의 입장을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며 그들과 더욱더 가깝고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도록 하기에 만족한다. 아빠도 마찬가지이다. 아빠는 술을 마시며 인생 얘기와 목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족 중 아빠의 취미를 함께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래서 평소에는 무뚝뚝한 아빠의 진솔한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장녀의 특권에도 큰 만족감을 느껴왔다. 이뿐만 아니라,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는 나의 사회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학교가 끝나면 동생의 반 앞에서 기다려야 하고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동생을 먼저 챙겨야 하는 일은 귀찮았지만, 이는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주위 사람들을 잘 챙기고 눈치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했다. 따라서, 나는 남들이 부담이라고 느끼는 역할과 의무를 오히려기회로 보아 긍정적으로 여기기에 스스로가 이 수식어에 부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장녀로서 복받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아주 가끔은 부담스러운 이 자리
그러나 돌이켜보면 가족과 끈끈한 관계가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마음과 집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다 보니 내 목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서 대학 입시를 했고 운이 좋게 고등학교 시절 내내 가고 싶었던 학교에 합격하였다. 기쁨도 잠시, 부담스러운 학비는 나를 고민에 빠지게 했다.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억 단위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데,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이 둘이나 있으니 아빠가 내 학비와 동생들까지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아 아빠를 설득하려 했는데, 아빠의 말 한마디에 나는 더는 조를 수 없었다. “아빠도 정말 보내주고 싶은데, 4년은 힘들 것 같아. 동생들도 아직 더 공부해야 하잖아.”라는 말에 나는 그제야 장녀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이 대학을 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내가 항상 만족해온 것은 아니며 가끔은 이 위치가 원망스러웠던 경험을 떠올리자 K-장녀라는 수식어가 뜻하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문득 걱정이들었다.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장녀라는 위치는 변하지 않을 텐데, 이 부정적인 면을 더 경험하게 되면 어떡하지? 라고 말이다. 따라서, 이 수식어에 포함된 문제점을 알아보고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 나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다운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질문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파악한 이 수식어의 숨겨진 문제점은 사람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정체성을 잃은 채, 장녀의 역할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즉,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사랑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이 역할에 맞는 책임감 있는 행동이며 가족이 만족할 수 있는 행동인가를 우선시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수식어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정체성을 찾고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잘하고 못하는지를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를 위해 나는 중학생 때부터 항상 변화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록해왔다. 예를 들어, 오이를 먹지 않았다가 오이를 먹기 시작해 식성에 변화가 생기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 변화를 감지하였고,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노트에 자세하게 작성하는 것이다. 변화를 통해 느낀 나의 감정과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요인까지 추가하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연구할 수 있기에 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의할 때 큰 도움이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되어온 나만의 데이터들은 내가 새로운 무리에 잘 적응하지 못해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을 때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나의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 즉, 이렇게 정체성을 파악하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명확히 파악함과 동시에 이를 장녀로서 해야만 하는 역할을 구분할 수 있어 이 수식어에만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다.
더불어 성인이 되며 느낀 여러 변화 속에서 나만의 정체성을 더 잘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추가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내가 실행하고자 하는 방법은 롤모델을 한 명 정해 배울 부분을 파악하며 연습을 통해 익히고, 나의 삶에 습관처럼 적용하는 것이다. 롤모델을 통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연구하면 나는 더 명확한 정체성과 여러 면에서 발전한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떠한 위치나 역할에 국한되어있는 내가 아닌,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나를 사랑하는 내가 되기 위해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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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일보. [m.hankookilbo.com]/ (2021).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1081014030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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