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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혜령 ]


# 생애초기, 사랑으로 완전해지는 경험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는 사랑으로 가득채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누군가가 먹여주고 씻겨주고 안아주죠. 울면 달래주고 불편한 데가 있으면 해결해줍니다. 따뜻한 눈빛과 세심한 손길이 함께합니다. 한번 웃기라도 하면 훨씬 더 큰 미소가(때때로 환호가) 돌아옵니다. 이 시기에 받는 사랑은, 커나가면서 '성적을 잘 받아야지만, 좋은 성과를 내야지만, 남들보다 도드라져야지만, 좋은 사람이 되야지만' 받을 수 있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죠.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마음이며 사랑이에요.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아기는 그 자체로 사랑받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으니까요. 마땅히 그래야만 하고요.


그러나 이 시기에 받는 돌봄은 살아가면서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생애 초기에 받는 이 무한하고 무조건적 사랑은 내면에 '나는 존재자체로 가치있는 사람이야.'라는 메세지를 새기게 하기 때문인데요. 이 시기의 체험과 메세지는 살아가는 내내 인간을 서 있게 하고 걷게하는 뿌리가 돼요. 정신적 힘의 근원이 됩니다. 험난한 사회생활과 인간관계 속에서 내가 나를 믿어주고 지켜줄 수 있는 힘이 기억도 못하는 시절에 받은 사랑이라는 거죠.


참 신기합니다. 요즘에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내가 나를 믿어줘야 한다.' 와 같은 말들이 쏟아지잖아요. 그런데 이게 너무 어렵지 않게 가능하려면, 단 한번은 타인으로부터 가득채워져야 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갓 태어나 세상에 적응하는 시기이고요. 텅 비어있던 주머니가 성인이 되서 갑자기 쏟아붓는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애초에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는 거겠죠.


심리학 연구들은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의사인 존 볼비(Jown Bowlby)는 영유아기에 주양육자로부터 받는 안정된 돌봄과 그 사이에서 형성된 애착은 심리적, 사회적 발달에 계속해서 영향을 준다고 했어요. 많이들 알고 계시는 '애착이론'입니다. 이 때에 안정애착을 형성한 유아는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주변환경 또한 자신에게 호의적일 것이라여기는 세상에 대한 신뢰가 생깁니다. 아시다시피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갖춘 사람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되는 수많은 과제와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나 상처에서 회복하는 회복탄력성도 높은 편이고요. 그야말로 심리적 금수저인셈이죠.


마찬가지로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은 0~6개월 시기를 절대적 의존기라고 하며 이 때에 엄마가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으로 아이는 전능감을 경험한다고 봐요. 엄마를 통해 욕구가 충족되고 정서적으로 채워지는데 이 것이 그 이후의 정서발달에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전능감을 느끼는것이 저는 마치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가득 채워넣어 보는 것처럼 마음을 가득채워보는 경험이 아닌가 해요. 완전해지는 경험. 무적이 되어보는 경험. 수많은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갈 우리에게 필요한 연료같은 거죠. 우리가 공허감을 느낄 때 '마음이 텅 비어있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그 느낌이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운 것인지도 알고요.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아무리 먹고 마시고 돈을 써봐도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득채워져본 경험이 무의식 속에 있으면 그 것을 발판삼아 다시 자신을 건강하게 채울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겁니다.



#그냥 사랑으로는 안돼.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사실 어려운 이론들이 아니라도 우리는 어린시절의 치명적인 결핍이나 상처가 되는 사건이 성인이 되어서 계속해서 영향을 준다는 것쯤은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도 어찌보면 관심과 사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때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일 거에요.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사랑 중에서도 제일은 엄마와 아빠겠지요. 가장 중요한 타인을 통해 사랑으로 완전히 채워지는 경험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다시 말하면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언제나 남아 있다. 언제나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랑받는 게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쓰라린 감정을 쉽게 일으킨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에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추앙'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요. 한동안 그 단어가 유행처럼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어요. 밤이 되면 술만 마시는 남주인공 '구씨'에게 여주인공 미정은 할 일을 준다며 말합니다.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사랑으로는 안돼. 추앙해요."


그리고 미정은 실제로 그 추앙이라 일컬어지는 사랑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기분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구씨와 달리 그녀는 꿋꿋하게 또 담담하게 그 사람의 안부를 묻고 챙겼고. 간섭이나 자기 뜻을 강요하는 일 없이 그저 그를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요. 구씨는 밤이 되면 술만 마시고 무기력하게 살 뿐이지만 미정은 그를 마치 아주 귀하고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마음을 씁니다. 뜨겁지는 않지만 몹시 한결같고 의연해 보였어요. 당연히 그 일관된 관심은 구씨를 흔들었고, 무엇보다 미정 스스로가 변화해갔어요. 매일같이 보여준 그 모습은 아주 큰 마음에서 나온 큰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흔히 보기 어려운 사랑의 방식이었으니까요.


'추앙'이 유행한 건 우리 마음의 어떤 갈증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으려, 손해보지 않으려 계산과 방어가 가득차 연애도 결혼도 그저 게임과 도박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요즘이잖아요. 친구관계도 직장에서도 상처받는 사람들이 넘쳐나고요. 어쩌면 요즘 세상이 살기 힘들어진 건 그런 조건없이 내어주는 사랑, 변함없이 동그랗게 품어주는 큰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보게 돼요. 추앙이라는 단어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도 저마다의 마음에 그런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고요.


한평생 나는 나 아닌 것들에 둘러쌓여 살아가는데 그 '사랑'이 빠져있으면, 사르트르가 말했듯 타인은 지옥일 뿐이겠지요. 그렇기에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또 어른으로 살아가는 긴긴 시간동안에 우리는 세상에 널린 그냥 사랑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크게 품어지는 진짜 사랑이 필요해요.



# 배우고 고민하고 성장할뿐


그런데 육아를 하는 엄마의 입장으로 돌아오면 이사실이 오히려 너무 큰 부담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생각이 많아지기도 해요.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과연 내가 내 아이에게 그 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싶죠. 나의 희생과 헌신이 부족한 것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고요. 아이 앞에서 자꾸 소진되는 나를 보면서 왜 아이에게 더 내어줄 수 없을까 좌절하기도 하겠지요. 한편으로는 포커스가 잘 못 맞춰져 모유수유를 해야만, 이유식을 손수 만들어 주어야만, 다양한 장난감과 전집을 개월수에 맞게 들여주어야만 완벽한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사랑을 너무 거대하게 생각해서 무력해하거나, 방법론적인 것들에 집착해서 수많은 정보와 떠다니는 이야기에 휩쓸려 다니는 모습도 많이 보여요.


생각해보면 '나는 한낱 부족한 인간일 뿐인데' 아이에게 완전한 사랑을 준다는 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금쪽이 얘기에 몰입하다보면 나 때문에 혹여라도 아이에게 문제와 결핍이 생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커지기기도 할테고요.


그러나 저는 이 '사랑'이라는 게 받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거대하고 큰 힘을 발휘하는 게 맞지만,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척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봅니다.


특히 갓난아기 시기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의 욕구에 맞춰 아이에게 모든 에너지가 집중 되죠.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쪽잠을 자면서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웠나 싶지만, 누구라도 그 상황에 놓이면 그렇게 합니다.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고 '잠 좀 편하게 자보고 싶어' 라고 외쳤던 그 시간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아이가 울 때마다 우왕좌왕하며 안아서 흔들어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그래도 달래지지 않아 무엇이 잘못된걸까 고민했던 시간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싶어요.


다만, 아이의 자아가 커지고 점차 발달해나가면서 마냥 주기만하는 게 어려운 상황들이 생겨나고 자꾸만 시험에 들게하는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그럼에도 아이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아이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서투를지언정 그 서투름 때문에 '저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이러니 하지만, 보통의 엄마들을 통해 아이는 완전한 사랑으로 채워지고 엄마들의 시행착오 속에서 아이들은 커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엄마라는 타인이 해줄 수 있는 건 변함없이 존재자체로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실수를 최소화하고 엄마 자신을 살피는 것.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주는 것일 거에요.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보는 것이죠. 



성숙하고 완전해서 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주기 때문에 점차 성숙해지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어려움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한 편, 오히려 엄마 자신을 다독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곱씹게 되는 것 같아요.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다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무엇보다 육아를 통해 나를 키워가는 '나'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면 의미있는 경험이자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받는 데에만 익숙했던 내가 넘치게 사랑을 줘보는, 서툴게나마 고민과 좌절을 더해 사랑을 애써본 경험은 나를 자라나게 하는게 분명하니까요. <나의 해방일지>에서 추앙을 받은 구씨보다 추앙을 결심하고 주기 시작한 미정이 더 성장했듯이, 사랑은 받는쪽만큼이나 주는쪽이 훨씬 채워지고 변화되는 경험이 되고 만다는게 의미가 있어요.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엄마들도 매일이 어렵지만 매순간 새로 결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정도에서 충분히 큰 사랑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에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도 많은분들이 오늘도 엄마로서의 부족함에 좌절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까다롭고 예민한 아이를 미워했다가 다 받아주지 못한 자신을 훨씬 더 미워해보기도 하고요. 육아는 언제쯤 편해지는 걸까 정답없는 질문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을 것 같아요. 


자책과 후회는 잠깐 접어두시고 잠든 아이에게라도 마음을 전해보세요. 고맙다고 사랑한다고요. 서투른 마음 그 자체로 표현해 보는 거지요. 어차피 우리가 줄 수 있는 사랑은 그렇게 완벽할 수도 세련될 수도 없을테니까요. 불편한 마음은 털어버리고 내일 또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겁니다. 내일 또한 무한한 사랑을 채워줄 수 있는 짧은 시간 중에 하루니까요.


수많은 실수들과 부족함 와중에도 그 마음은 꼭 아이 내면에 가 닿을거라 믿어요. 저또한 오늘은 실수투성이였지만 내일 또 새롭게 시작해보려고요. 아이가 앞으로 걸어갈 기나긴 삶의 여정에서 건강한 마음의 토양이 되기를 바라면서 사랑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어 봅니다. 오늘은 이게 제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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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1-29 08: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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