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지
[The Psychology Times=김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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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엄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나보다도 어린아이 같은 엄마의 단짝 친구는 바로, 옆집에 사는 ‘이모’이다.
'이모'는, 내가 그녀를 정답게 부르는 호칭이다. '이모'는 우리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고, 알게 된 지도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를 나눈 친척들보다도 더욱 우리를 사랑해 주었고, 훨씬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마치 두 번째 엄마 같은, 엄마에게는 친언니 같은 존재였다.
엄마는 ‘이모’를 좋아했고, 한편으론 부러워했다. 둘은 무척 가까우면서도 복잡한 관계였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이모'에게 일방적으로 가지고 있던 감정이 그랬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친딸인 나조차도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엄마는 사랑스럽지만, 항상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널을 뛰는 엄마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이모’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의 엄마는 사랑스럽고, 또 천진했다. 특이점이 있다면 그날 엄마가 유독, 시한폭탄과도 같은 감정 상태에 있었다는 것 정도였을 뿐이다.
그날 나의 엄마는 결국, 부러움에 의한 시기심을 견뎌내지 못했다. 』
위의 이야기 속, ‘나의 엄마’가 가진 시기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흔히들 애정결핍, 즉 어린 시절 엄마의 편애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일어난 결핍을, 해당 현상의 주된 원인으로서 꼽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시기심이라는 감정의 뒤에는 비단 이것만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편애로 인한 상처 뒤에 숨어 있어 자칫 지나치기 쉬우나, 명백하게 시기심을 조장하는, 엄마를 ‘소유’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이 경우, 스스로가 가진 욕망을 방어하고 은폐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박해자와 공격자로 만들기도 하고, 그 과정을 거치며 과도한 공포 및 불안, 두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를 일컬어 ‘소유에 대한 욕망’이라고 한다. 이러한 종류의 욕망은 대상을 가리지 않으며 어떤 상황, 관계에서든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기에 만약 이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될 경우에는, 몹시 위험한 상황까지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심리학자 멜라니 클라인은, “아이와 어머니 관계에서 발생하는 시기심은 아이가 선망하는 어머니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하나로 융합하고자 하는 충동과 욕망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 욕망이 실현되지 않고 좌절될 경우나, 그것을 아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한으로 간직할 경우에 박해 불안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왜곡이 통과되지 못하면, 자신과 자신을 박해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함께 파괴하려는 충동 및 증상을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내적으로는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해 일어나는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원시적 시기심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가진 결핍과 결여, 즉 상실에 대한 경험을 수용하면서 성장을 해야만 진정한 어른으로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실을 겪었으나 심리적으로는 그러한 상실을 용인하지 않은 채 성장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대다수를 이룬다.
‘시기심’은, ‘부러움’이라는 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다. ‘부러움’에 동일시가 일어나서 어떠한 대상을 극도로 좋아하다가도, 그 동일시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갑작스레 ‘시기심’으로 돌변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가까운 주변 인물 중에서 당신이 유독, 유난히 질투와 시기심을 느끼는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에게서 당신이 ‘가지고 싶으나 가지지 못한 어떠한 것’을 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편애 받는 아이 쪽은, 과연 그것을 받지 못한 형제들보다 행복할까? 슬프게도, 그렇지 않다. 엄마의 편애가 주는 대가란 생각 외로 가혹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기 마련이지만, 보편적인 딸과 아들의 경우로 나누어 보았을 때, 늘 편애 받고 자란 아들은 성인이 된 후에 다른 형제들을 대신하여 부모에 대해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받은 사랑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한다지만, 이들로서는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닌 데다, 편애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하기에,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편애를 받고 자란 딸의 경우에는, 또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엄마와 딸이 매우 심하게 밀착된 상태에서, 엄마는 딸의 모든 것에 끝까지 개입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딸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고는 한다. 그 결과로, 엄마는 나머지 형제들에게 끝없는 희생과 돌봄을 나누어지게 하는데, 엄마의 사랑이 늘 고팠던 이들은 그렇게 엄마의 편애 속에서 무능해진 형제자매를 돌보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대가로 치르기도 하는 것이다.
- 후편,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딸’이고 싶었다 [2]>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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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어 본 적 있어요?”
“사실은, 빨리 철들지 않아도 되었던 친구들이 참 부러웠던 것 같아요.”
[1] 노답 인생+구제불능 인간=나 : “나란 인간은 언제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2] 노답 인생+구제불능 인간=나 : “나란 인간은 언제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참고문헌
박우란. (2020).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유노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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