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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태양왕’ 루이 14세의 생활은 호화의 극치였고, 특히 발레를 사랑했다. 궁전에서 발레 공연이 종종 있었다. 발레는 종합예술로 무용수가 있어야 하고, 의상과 음악도 있어야 한다. 발레 공연 발달로 발레는 물론 의상과 음악도 같이 발달했다. 절대군주 시대에는 왕의 기호에 따라 예술 장르의 운명이 달라졌다. 지금도 비슷한 경향이 있지만 군주시대에는 더 심했다. 왕이 애정하는 예술에 자본이 흐르고 사람이 모였다.


19세기 독일 남부 지방 바이에른 왕국의 왕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을 ‘태양왕’의 낭만적 그림자로 여겨 ‘달왕’이라고 여겼다. 루트비히 2세가 품었던 열정이 바이에른주에 남아있다. 그는 군주제가 쇠락해 가는 시기에 왕이 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9세에 왕좌에 올랐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에 둘러싸여 전쟁이 한창이었고, 바이에른 왕국도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정치보다는 문학과 예술, 음악에 쏠렸다. 그는 극장을 만들어 대중들에게 셰익스피어부터 모차르트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을 소개하고 공연을 올렸으며 직접 연극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에게 예술은 차갑고 숨 막히는 궁정 생활로부터 달아나는 피난처였다. 그는 바그너 음악에 심취해서 바그너가 진 빚을 다 갚아주었고, 바그너를 곁에 두고 후원했다.


왕의 역할은 루트비히 2세의 적성에 안 맞았고, 복잡한 국정에서 점점 달아났다.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돌아온 후 프랑스처럼 화려한 궁전이 바이에른 왕국에 하나도 없는 것을 한탄했다. 그는 베르사유 같은 궁전을 건설하려는 로망을 가졌고, 실행에 옮겼다. 호화로운 성을 짓는데 막대한 왕실 재산을 썼고, 나중에 개인 대출까지 받아서 파산했다. 그의 탐미적 취향은 극으로 치달았다. 그럴수록 국정에는 소홀해져서 결국 왕좌에서 쫓겨났다. 폐위된 지 며칠 지난 후 근처 지방 호수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자살이라고 발표되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는 의문사에 가까웠다. 그는 왜 화려한 성에 몰입했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을까?



첫 목적지 린더호프 성을 향해 출발했다. 뮌헨 중앙역에서 출발하는 현지 여행사 버스는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꼼작도 안 했다. 11월에는 12월에 열릴 크리스마스 마켓 손님맞이를 위해 도로 단장을 하는 시기였다. 곳곳에서 공사를 하는 바람에 길이 막혔다. 예상치 못한 정체로 궁전에 원래 도착 시간보다 40분쯤 늦게 도착했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는 바람에 일정에 맞추느라 그 뒤 일정은 빠듯하게 진행되었다. 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가이드는 연륜의 망토를 두른 사람이었다. 자신의 명함을 버스에 탄 승객 모두에게 돌리며 다른 투어를 홍보하는 일에는 철저했지만, 정작 그날 진행하는 투어에는 부실했다.


폴을 보면서 능숙함이란 옷을 입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련해진다. 많은 시간 층에 경험이 겹겹이 발라져 조금이라도 넘치는 친절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노련함이다. 폴은 가이드로서 할 일의 범위를 꼭 맞게 재단해서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일하는 사람이었다. 폴은 4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을 인솔하기 위해 자로 잰 듯한 ‘규격화된 친절’로 무장했다. 느끼지 않아도 좋을 것을 느끼는 내 예민함을 탓했다.


겨울 초입이라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해가 잠깐씩 얼굴을 내밀었다. 린더호프 성은 알프스 자락에 둘러싸여 있었었다. 고즈넉한 숲길을 따라가면 린더호프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성은 여름 궁전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려는 루트비히 2세의 욕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규모는 작지만 화려하고, 베르사유궁을 본떠 거울의 방도 있고, 정원도 베르사유궁의 트리아농을 본떠 만들었다. 이곳에서 ‘달왕’답게 루트비히 2세는 햇빛을 피해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산책을 했고, 실제로 달빛 아래서 썰매 타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의 탐미적 취향은 노이슈반스타인성에서 정점을 찍는다. 슈타인이 백조란 뜻이라 ‘백조 성’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원래 요새였다. 요새는 전쟁에서 적들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므로 주로 높고 고립된 지역에 자리 잡았다. 성으로 가려면 40분가량 걸어 올라가야 했다. 길 경사는 완만했다. 초겨울의 습기로 땅은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성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성을 마주 보며 걸음을 옮기면 보이는 것이라곤 성뿐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성은 점점 커져서 머리와 어깨를 감쌌다. 마침내 성 앞에 다다랐고, 고개를 들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이었다.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못 보고 놓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영토를 지키는 일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도 고립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루트비히 2세가 성을 짓는 자신의 결심에 빠져 물불 안 가리는 맹목성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 군사적 목적으로 쓰였던 요새를 성으로 리모델링하는 게 유행이었다. 루트비히 2세는 이 요새를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이미지를 실제로 구현해 인상적인 성으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설계도부터 건축 재료까지 직접 진두지휘해서 자신이 사는 동화 속 세계를 현실에 그대로 옮겨오려고 했다. 그는 바그너 오페라에 푹 빠진 터라 노이슈반스타인성은, 바그너를 위한, 바그너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루트비히 2세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후원이 없었더라면 오페라 <탄호이저>는 세상에 못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탄호이저>를 모티브로 노이슈반스타인성을 리모델링했다. 성 곳곳에 있는 방들 콘셉트는 탄호이저 주제에서 가져왔다.


성에 도착해서 높은 곳에 올라 사방에 보이는 것은 산뿐이었다. 산속에 홀로 자리 잡은 성은 마치 루트비히 2세가 놓인 상황 같았다. 정치, 전쟁 등 실제 사람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세상과 단절된 곳이었다. 예술이 노래하는 세상 속에 푹 빠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이 몰입은 이해받지 못하고 고립을 더욱 재촉했을 것이다. 루트비히 2세가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앉아서 도망치느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는데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그는 완성된 성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격렬하게 몰입한 대상이 마침내 눈앞에서 실현되었을 때 희열은 잠시이고, 현실 도피를 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상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이 성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은 디즈니사 사장 덕분이다. 디즈니사 사장이 성을 방문한 후, 성 이미지를 회사의 로고로 썼다. 디즈니에서 만든 모든 애니메이션 첫 부분에 성 이미지가 반짝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 이미지가 바로 노이슈반스타인성이고, 디즈니사의 상징이 되면서 관광객의 관심도 일 년 내내 반짝반짝 빛나게 되었다.


미치광이 왕으로 알려진 채 생을 마감한 루트비히 2세. 그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의 덕질이 남긴 탐미적 취향의 끝판을 보러 몰려간다. 건축 덕질 끝판왕이었던 그는 당대에 사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고, 비난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치광이 짓은 예술이란 이름을 얻어 불멸한다. 루트비히 2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해 받지 못한 흔적은 이제 예술로 명명되었다. 광기와 예술의 경계는 무엇일까? 광기와 예술의 운명은 같을 때도 있고, 전혀 다른 길을 갈 때도 있다. 한 시대에 골칫거리가 다른 시대에는 찬사를 받는다. 시대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달라지는 걸까? 아니면 디즈니사의 로고가 되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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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4-12 2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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