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예솔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추예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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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사는 것 같다’는 말을 뱉은 적이 있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두 인물이 만나 직접적 영향을 주고받는 형태의 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태초의 내 사랑은 다소 일방적인, ‘연예인’을 향한 맹목적이고 순수한 사랑이었다. ‘덕질’(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를 이르는 신조어)의 시작은 중학생 때부터였다. 나는 연예인의 스케줄을 전부 꿰고, 앨범을 전부 사들이고, 영상 보기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행위는 장장 6년간 지속됐다. 그리고 영원할 것만 같던 감정은 돌연히 찾아온 권태로움과 함께 끝이 났더랬다.
이후 드라마를 보거나 우연히 공연 영상을 접하게 될 때마다 평온한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몇몇 연예인에게 빠지긴 했으나,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그 감정의 수치를 기준점으로 현 사랑의 척도를 판별하고자 했고, 이상하게도 그 과정에서 줄곧 압박감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연예인을 응원했던 경험을 떠올려본다. 당시 나는 그 마음을 최대한 오래도록 보존하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제는 그 사실을 한 친구에게 고백한 직후에 발생했다. ‘누군가 지금 내 감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긴장이 되어 감정에 균열이 일었다. 어쩐지 친구에게 일관되고 연속적인 감정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감정의 지표가 될 수 있는 행동을 강박적으로 하고자 했다. 가령 하루에 몇 번이고 영상을 보거나, 스케줄을 전부 꿰고 있다거나, 해당 연예인을 보며 웃는 등의 행동 말이다. 어쩌면 나를 위해 좋아하고 있는 것인데, 타인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 항목처럼 여기는 나 자신이 납득되지 않았다. 이러한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후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고,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은 터득하게 됐다.
에세이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 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를 확인해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요컨대 나는 지금껏 내가 사랑해온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거울 따위로 치부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내 심리를 확인하고 이전의 나와 비교하게 하는 매개체로 말이다. 또 내가 ‘타인을 얼마나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도구로 이용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드는 의문점은 내가 사랑한 것이 온전한 그의 모습일지, 아니면 내 해석이 상당 부분 가미된 모습일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막론하고 애초에 ‘타인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좋아한다’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한 지표 중 하나로, ‘상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적 실천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는 어쩌면 ‘진정으로 좋아하는 데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 앎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적인 욕망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또 내 모습은 예전과 달라졌음에도, 자꾸만 이전의 사랑을 기준점으로 그 틀에 맞추려고 한 것 역시 문제점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덕질 외에도, 언젠가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게 만든 대상에 관해 언급해야 할 것이다.
A는 언제나 나보다 자신이 할 일을 중요시했고, 내 의견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단 가치와 효율에 따라 선별했다. 때로는 나를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한병철의 에세이에서 나왔던 “끊임없이 자기 착취를 일삼는 ‘성과 사회’에서 사람들은 효율을 중시하다 보니, 사랑은 소비를 하는 방식으로 변질되기도 한다”는 맥락의 이야기와도 궤를 같이한다.
처음에는 나와는 다른 그의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포용하게 됐다. 이는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지금껏 나는 상대방을 절대적인 우선순위로 두고 그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사랑의 전부인 줄 알았지만, A와의 교제 끝에 사랑의 스펙트럼 자체가 넓어지는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당시를 기점으로 이전의 나와 달라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나는 내 변화를 무시하고 사랑을 일관된 것으로 정의했으며, 그 안에 나 자신을 가두고자 했다. 그건 내가 가진 다양성을 부정하고 나를 평면적 틀에 통해 바라봤단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었을지 모른다.
에세이에서는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이 문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를 의식함으로써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안에서 변화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평면적으로만 해석하고, 감정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기는 일을 삼갈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저, 내가 이렇게나 유동적이고 가변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사실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한 더욱 진솔한 사랑을 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진솔한 사랑을 하고자 하는 욕심은 버리고자 한다.
어쩌면 나는 이전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적인 행복을 선사했던 첫사랑의 대상처럼 누군가를 넘치도록 사랑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형태의, 다른 결의 사랑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좀 더 유연해지고자 한다. 그러면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물론, ‘사랑 안에서 자화상과 마주하는 현상’은 오히려 순기능으로 변모해 ‘긍정적인 자아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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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덕질'의 정의 - 네이버 오픈 사전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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