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예솔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추예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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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두 달 전의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꺼내 본다.
몸이 물에 반쯤 잠긴 채로 꾸역꾸역 연명해가는 기분이었다. 그 전 주까지만 해도 나는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이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대외활동의 지원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다른 일을 하느라 미뤄뒀던 지원서에 장장 일주일간 매달려 잘 써내고 싶었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는 한 달 전 예약해놓은 여행 티켓이 있었다. 그렇게 할 일을 뒤로 미룬 채 쫓기는 기분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이란 본디 낯선 장소에 대한 묘한 설렘과 들뜬 기분으로 자연에 몰입하여 생각이 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데 머릿속이 온통 '해야 할 일'로만 가득 찼던 나는 단 한 순간도 여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왔을 때 비로소 지원서를 잘 써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완벽하게 해내겠다’라는 목표 앞에서 고작 3일이란 시간은 턱없이 적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란 좌절감이 의지를 압도했다. 평소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일뿐이다. 그런데 가장 친한 친구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큰 포부를 안은 채 노량진으로 떠났고, 다른 친구는 지구 반대편에서 낯선 언어를 사용하며 다른 시차를 살아내고 있었다. 전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끝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렇게 무력감을 견뎌내며 겨우 10장이 넘는 지원서를 작성해 냈지만, 급하게 퇴고를 하는 바람에 만족이 되질 않았다. 실패에서 기인한 절망감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곧잘 심리학 기사를 써내야 했지만, 이전처럼 오랜 시간 여러 서적에 천착하기 어려웠다. 책을 펴보았지만, 활자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읽으니 정보가 입력되지 않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계속해서 잠이 쏟아졌다. 당연하게도 글쓰기는 힘에 부쳐 침대 위로 엎어지기를 반복했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마다 반쯤 물에 잠겨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신이 멍했다. 내 할 일을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기비하와 자괴감이 심해져 갔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가라앉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력감의 시초는 어디일까.
수면 위로 올라오기 위해선, 어쩌다 이러한 상황에 부닥쳤는지를 인지해야 했다.
우선 코로나의 장기화로 홀로 방 안에 틀어박혀 고독감 속에 경도될 때가 많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었다. 게다가 가장 친한 친구들이 당장 곁에 없다는 것은 물론, 누군가를 지속해서 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닌 탓도 있었다. 학교에 다녔다면 매일같이 보는 동기들과 밥을 먹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을 테고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히지도 않았겠지만, 그럴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전화를 걸 수 있는 대상이 거의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은 굳게 지켜왔던 인간관계에 관한 내 가치관 자체를 흔들어 댔다.
그간 나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만을 추구해왔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건 딱 질색이라는 반응을 숱하게 접해왔지만, 사람은 원래 필요에 의해 유지되는 게 아닌가 했다. 하다 못 해 같이 무언가를 먹고, 대화를 나누고, 노는 것 역시 '필요'가 맞으니까. 그러니 모든 관계는 필요에 의해 이어지는 것이고 필요가 없으면 거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지 않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제야, 가벼운 관계라고 할지라도 연락을 이어가려는 시도가 필요했던 것인가 싶었다.
또 당시 아르바이트 면접에서도 거듭 낙방했고, 지원서를 맘에 드는 퀄리티로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점철돼 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문을 끌어냈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동물이 자신에게 발생하는 혐오스러운 경험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때 그 상황을 바꾸거나 벗어나려는 노력을 포기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제 더는 내 노력으로 무언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기야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번아웃'이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물론 이러한 원인이 전부가 아니고,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따라 좀 더 깊이 박혀 있는 본질적이고 관성적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긍정적 상상: 홀로 설 힘을 통해 행복 찾기
현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를 반추했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행복감을 느끼는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과를 적어 내려갔다.
1. 아침에 일찍 일어났을 때
2. 운동해서 활기를 얻을 때
3. 친구를 만나서 수다 떨고 힐링할 때
4. 재밌고 설레는 드라마를 봤을 때
물론 위와 같은 방법들은 본질적인 해결을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회피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때로 회피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필사적으로 꺼내게 되는 최종 보루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위 목록이 왜 내 행복감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종의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 및 심리학적 이론을 가져와 설명해보고자 한다.
앞서 '드라마를 보는 것'이나 '친구를 만나 대화'하는 과정을 두고선, 칸트가 한 말을 언급하고 싶다. 칸트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자각하는 과정을 두고, ‘현재 내가 아름답다는 감상에 빠져 있다는 자각 없이 그 안에 매몰된 상태’라고 지칭한 바 있다. 이를 몰입의 과정과 결부시켜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것에 푹 빠져 재밌다고 느끼고 그걸 좋아하게 되는 건 '현재 긍정적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자각 없이 오롯이 그 행위에 몰입한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앞선 행위들은 해당 주제에 깊이 몰두해 다른 부정적 생각이 지워지므로 행복감에 도달하는 것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운동의 경우에는 어떨까. 이는 정동의 개념을 참고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정동을 명확히 정의하긴 어렵다. 다만 시인 김수영이 시를 두고 정의한 바를 경유하여 설명할 수는 있다.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요컨대 어떤 감정을 느껴서 시를 작성했다기보다 무언가를 쓰는 행위를 이행해나감과 동시에 즉각적인 감정이 피어났다는 얘기다.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무력해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해도 역설적으로, 움직이는 순간 정신적으로 재충전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는 시도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행함으로써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습관을 만들거나 취미 활동을 하는 것으로 정신을 환기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시금 난관에 봉착했다. 인간관계의 부재나 충족하기 어려운 외로움 같은 것 말이다. 그때 마침 <중독>을 주제로 한 '한편'이라는 잡지를 접했다. 그제야 모종의 돌파구를 찾은 듯했다. 지금부터 얘기할 것은 메타버스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이야기다.
SNS 중독을 새로운 관점으로 들여다보기
해당 잡지에서 어떤 작가는 ‘중독’이란 증상을 새롭게 바라봤다. 중독은 의학적 용어에서 정의하듯 반드시 고쳐야만 하는 부정적이고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며, 어쩌면 우리가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끊임없이 사랑할 대상에 ‘중독’되면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을 이어갈 힘을 얻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일 테다. 위와 같은 새로운 관점을 메타버스에 해당하는 SNS나 연락 수단에 대한 시각과 결부시켜 보려 한다.
그간 나는 메타버스의 부정적 면면을 강조해왔다. 예전에 인터넷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었던 전적에서 그 단점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윗 글을 접하고 나서, 메타버스를 개인적이고도 단발적인 경험에만 빗대어 안 좋은 것으로만 치부하고 마는 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메타버스를 통한 소통은 좀 더 주체적으로 삶을 이행해나가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자각하기 위한 의식적인 활동의 일환으로 뒤바꾸어 활용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단점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더욱 단절을 불러일으키고, 도리어 우울감을 유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드는 게 사실이다. 여기서 ‘거리 두기가 반드시 심리적인 거리 두기만은 아니’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이러한 말이 시사하는 것은 단순히 SNS나 연락 수단과 같은 메타버스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여 끊임없이 반발심을 느끼는 데서 벗어나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보고 새로운 상황에 노크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도전 의식이 피어올랐다. 이전에는 친구들에게 연락할지 말지도 망설이다가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먼저 손을 내미는 것으로 시작해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마치며
상기한 내용은 다소 개인적이며, 어떤 학구적인 정보를 포함한 것도 아니기에 기사의 소재로 삼기엔 다소 부적합하지 않나 싶었다. 다만 나와 같은 취준생이나, 코로나의 장기화로 방 안에 틀어박혀 온종일 무력감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안겨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용기를 냈다. '나'라는 사람은 현시대의 흐름이 형성한 부분도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 속에서 우리는 모종의 보편성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내 고민은 개인적인 한편, 보편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보편성에서 오는 공감을 통해 나아갈 힘을 얻었으면 한다.
물론 번아웃이 왔을 때는 쉬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내려놔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야 도태되지 않는다고 주입해대는 이 세상에서, 나는 하릴 없이 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차선책으로라도 위 사항들을 의식적으로 행하려 한다. 현재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모두가, 내가 던진 고민에 동참하는 것으로 하루빨리 활기를 얻을 수 있길 기원한다. 단순히 어떤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나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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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민음사, 2022.01.28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
김지효 외 9명, 한편 7호 중독, 민음사, 2022.01.14
스티븐 코슬린 외 6명, 심리학개론, PEARSON, 20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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