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예솔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추예솔 ]
Sofia Alejandra 님의 사진, 출처: Pexels
2020년 그러니까, 대략 2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예전에 썼던 일기를 펼치자 아래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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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이후 칩거 생활이 길어지면서, 외부로 향하던 관심이 내부에 쏠리게 됐다. 그러면서 현재 내가 앓고 있는 증상들에 대해 정의할 수 있었다. 다소 사적이지만 요즘 내내 갖고 있었던 생각이니 만큼 풀어보고자 한다.
나는 생각 때문에 자꾸 사람을 잃는다. 이는 물리적인 거리를 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면 그 생각들을 했다는 생각 때문에 특정인과의 내적 거리가 자꾸만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그런 식으로 사이가 불편해진 관계는 더 이상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가 없다. 얼마 전 우연히 바닥에 놓여 깄던 완충제를 밟아 터졌는데 그게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내 현 증상이 뾱뾱이와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컨대 내가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겐 각각 뾱뾱이가 하나씩 있는데, 사람마다 터지는 시기는 다르지만 일단 그걸 터뜨린 순간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사실 얼마 전부터 많은 것을 잃었다. 물리적인 것부터 심리적인 것을 포함해 여러가지를. 그래서 잃는 게 익숙하다. 또 잃고 난 뒤에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다고 포기하며 그 전의 것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도 익숙하다. 이건 내가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스로 방이기제처럼 이용하는 방법이겠다. 그래서 이렇게 상대와의 거리가 멀어지면 그 대상이 아무리 절친한 10년지기 친구라 할지라도 그냥 포기해버린다. 일정 기간 지나면 모든 상대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내 병이 또 너한테 있는 완충제까지 터뜨렸구나, 하며 걔한테 있었던 예전의 나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지워버리는 것이다. 한 번 변해버린 나는 평생을 가도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 하니까. 계속 아쉬워하고 품으면 견디기 어려우니까.
그런데 얼마 전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내 병이 아주 가까운 가족에게까지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개 가족 구성원과는 불편한 상황 하나가 생기면 길어봤자 하루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갑자기 든 내 생각은 자고 일어나 다음 날이 됐을 때도 증발하지 않았다.
이미 완충제를 밟아버린 다른 모든 관계에겐 그러지 못 할지라도, 적어도 가족에게 있어 나는 장난기도 많고 유쾌한 구성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모두에게 있는 스위치가 가족에게도 적용됐고 이미 눌려버린 이상, 여생 동안 예전의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모두가 다른 이들에겐 불편해도 가족에게만큼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 할까 두려웠다. 내가 유일하게 편하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없어질까봐. 나를 잃을까봐. 너무 무서워서, 이 얘기를 입 밖으로 꺼냈을 땐 목 놓아 우는 채였다.
말하자면 나는 이제 집을 잃은 셈이다. 어디에서도 내 주체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한 강박적 사고를 쉴 공간을 찾지 못 한 것이다. 나는 이제 가족들을 대면할 때마다 내 경직된 표정을 신경 쓰고 걱정해야만 했다. 이건 눈을 깜빡일 때 마다 지금 내가 깜빡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의식하는 것과 같다. 소설을 읽을 때 활자를 읽는 데 집중한 나머지 내용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같다. 어제도 웃긴 상황에서 웃기다는 것을 인식하고 웃었는데 가족 중 누군가 내 일그러진, 다소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보고 뭐냐며 놀리듯 웃었다. 내 웃음 뒤에 있었던 생각까진 보지 못 한 것이다. 불편했다.
사실 이러한 감정은 사회생활을 할 때에 적잖게 느꼈다. 단 한 번도 집에서는 겪지 못 했다. 그런데 이 감정이 바이러스처럼 집에서까지 전이됐을 때, 나는 부정적인 감정은 다만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고, 옮겨가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심리 관련 영상을 찾아봤을 때 어떤 이가 한 말에서 또 다른 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본인의 느낌을 붙잡지 말고, 기억을 붙잡으라는 말. 본인 솔직한 걸 생각하지 말고 관계를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자꾸만 타인에 대해 과도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잃어가는 것은, 나는 어때야 하며, 그 성질은 변함없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것일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조언은 내게 꼭 필요한 것으로 다가왔다. 집에서 지내면서 우울감을 느낄 때가 많아지면서, 이러한 증상을 겪는 이들이 나 말고 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사하고, ‘고립’과 ‘단절’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나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면서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내겐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다시금 느끼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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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위와 같은 깨달음 속에서, 전에 봤던 201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비듬』이라는 희곡의 내용이 떠오르기도 했다.
『비듬』의 주인공 ‘용식’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자체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방에 고립 시키면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홀로 지내다 보니 머리에 비듬이 너무 많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정리 차 미용실에 들른다. 비관적이고 염세적 성격의 그는 돌연 한없이 낙천적인 어떤 손님과 가치관 대립으로 싸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손길이 자신을 스친다. 옆 손님은 이상한 사람이라며 신경질을 내며 밖을 나가는데, 그때 용식은 잠깐의 손길이 실로 오랜만에 닿는 사람의 체온이라서, 그게 너무도 따뜻해서 도리어 울컥하고 눈물을 흘리고 만다. 혼자 지내는 거 안 어울려요, 미용사는 그를 보며 말했다. 주인공은 무언가 심경의 변화를 느끼면서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
과연 사람은 세상을 온전히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을 던졌던 거 같다. 예전에 일부러 주기적으로 사람을 만난다는 이를 봤다. 사교적인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소속 욕구가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게 돼 있다면서. 그게 본능이니까.
물론 정말 혼자인 것을 선호해서 개인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나 역시도 그렇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 이런 선호가 혹시 일종의 차단에 의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스스로가 만든 나에 대한 고정관념은 아닐까. 여러 번의 실패가 만들어낸 장벽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견고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사회는 여러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문을 두드리면 단숨에 깨어질 벽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문을 닫진 않으니까. 인간이 싫다고 해도, 그게 모든 이에게 해당 되는 것은 아니니까. 결국 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너무도 좋아하는데 잘 안 돼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혐오는 아닐까. 이런 생각이 연쇄적으로 들었다.
심리적 갈등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누군가 나를 관심 있게 봐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범죄률도 줄어들 것이라는 말이 표방하듯, (이는 범죄자를 옹호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저 앞으로의 예방을 위해 주변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라는 의도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지속적인 관계는 상당히 중요할 것이다. 내가 위와 같은 심리적 갈등을 겪은 것은 사실상 단절에서 비롯되었듯,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라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상황이 안 된다면 비대면으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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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과 달리 지금의 나는 전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누군가를 심리적으로 잃더라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는 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결코 쓸데 없는 것이 없고, 하다 못 해 ‘지나고보면 전부 부질 없는 것들’이라고 특정되는 사안들도 사실상 그것들을 거쳐온 자만이 발화할 수 있는 특권이나 다름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을, 거쳐갈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하는 생물이므로, 내가 이전과 계속해서 달라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의 건강을 위해, 의식적으로라도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해 연결돼 있다는 자각을 얻어갔으면 좋겠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내일은 조금이나마 편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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