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우
[The Psychology Times=최지우 ]
에포케(epochē)는 그리스어로 ‘판단중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배움이 깊어지고 경험이 쌓일수록 모르는 것은 더 많아지고,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게 세상인 것 같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은 자기가 에포케의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고 답해주었다. ‘나는 아직 모른다’는 마음으로, 굳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모든 것에 답을 매기려 하지 않는다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인다고. 그 이후로는 필자도 생각이 과도하게 깊어질 때마다 에포케를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들을 향한 판단의 잣대
좋다, 나쁘다. 또는 맞다, 틀리다.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보편화된 요즘이다. 극단적인 두 선택지를 놓고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밸런스게임도 이러한 사고 틀의 연장선이다.
우리는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점은 ‘판단’이다. 타인에 대해, 현재 마주한 상황에 대해, 나 자신에게도 판단의 잣대가 놓인다.
‘이 친구는 성격이 너무 활발하네, 나랑 안 맞겠다.’ ‘저 사람은 왜 저러지? 이해가 안돼.’ ‘그러면 이때는 이렇게 했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이런 내 성격은 나쁜 것 같아.’와 같은 무수한 판단과 잣대들. 그리고 잘잘못을 따지기도 한다. 이건 너가 잘못했고, 이건 내가 잘못했고. 이때는 이랬어야 했고, 이게 맞았던 거고. 이렇게 인지하는 행위를 한 번 끝내버리고 나면 그 생각은 꽤 오랫동안 우리 안에서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계속 판단하려 할까
사람은 누구나 인지적 종결 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을 가지고 있다. 인지적 종결 욕구란 모호한 상황 등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인지적으로 빠른 해답을 얻어냄으로써 그 문제가 기인한 불편함이나 불안을 종결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즉 어떤 문제와 관련된 결론을 최대한 빨리 이끌어내어 그와 관련된 인지적 정보처리 과정과 판단을 종결시키려는 동기다.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태도
필자도 에포케의 태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판단해서 결론이 내려지는 때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결국 불편하고 힘든 건 나 자신이었다.
이 세상에 정답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의미가 부여된 것일 뿐이다. 좋고 나쁜 것도, 맞고 틀린 것도 없다. 그저 그럴 뿐인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타인을 대할 때와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할 때 특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SKAM'이라는 노르웨이 드라마의 대사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행동으로 힘이 들 때 항상 상기시키려 노력했던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보이는 단 하나의 면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기. 이렇게 생각하면 ‘나’의 마음이 가장 편해진다. 타인에게 ‘동의’하지는 않아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사소한 상황과 말들에 상처를 덜 받고 초연해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줄 때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평소 필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성격들을 스스로 검열할 때가 많았다. 스스로를 향한 윤리적 잣대가 높다고나 할까. 예를 들면 예민한 성격은 좋지 않은 성격이라는 인식이 커서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게 싫었고, 예민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판단과 검열을 멈추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적 잣대를 잠시 내려놓으면 나를 나 자신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굳이 지금 답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모르는 채로 두고 넘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 또 다른 경험을 하고나면 그제서야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때 답을 찾아도 시간은 충분하다. 사실 답을 굳이 찾지 않아도 괜찮다.
판단을 멈춘다는 말이 생각을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생각의 길을 열어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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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신경아, 「인지적 종결욕구가 대학생들의 문제 상황인식과 커뮤니케이션 행동에 미치는 영향」,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제12권 제1호,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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