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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이해연 ]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인간은 ‘타인의 슬픔’을 공부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째서 타인의 슬픔을 배우기 어려워하는 것일까. ‘슬픔’.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슬픈 마음이나 느낌’, ‘정신적 고통이 지속되는 일’이다. 슬픔이란 대게 견디기 힘든 것들이다. 누군가의 죽음, 상실, 이별, 실패 따위의 감정을 쉽게 견딜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러나 이와는 모순되게 인간은 슬픈 음악과 비극 따위의 연극을 즐기곤 한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음악 심리학자 리알라 트로피는 보통 사람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피하려 하지만, 슬픈 음악은 예외라는 연구결과를 밝힌 바 있다. 더불어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과정인 매튜 엘리엇 삭스의 논문에 따르면, 슬픈 음악을 들을 때 75%의 사람들은 실제로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향수’를 경험한다고 한다. 향수란 고향 또는 지난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즉 사람들은 슬픈 음악을 통해 현실 속 실제 슬픔보다는, 지나간 것에 대한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이때의 슬픔이란 현실의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효력을 잃어 즐길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슬픔이다. 슬픈 음악을 듣는 우리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음악은 어디까지나 가공의 매체이며, 현실의 나와는 무관계하다’라고 강하게 인식하는 심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고 인식하는 안도감이 쾌감을 자아내 슬픈 음악을 즐기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불행에 쾌감을 느낀다. 타인의 불행은 우리 뇌의 즐거움과 쾌락에 관여하며, 행동하는 데 필요한 의지와 의욕에 불을 지핀다. 그러니 ‘인간 존재 자체가 결함’이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은, 타인의 슬픔을 배우기 어려워하는 우리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슬픔 따위의 고통을 느낄 때 인간의 뇌 활동을 관찰하면 눈에 띄게 드러나는 특정 부위가 있다. 전문 용어로 ACC(Anterior Cingulate Cortex)라고 줄여 부르는 ‘전방대상피질’이다. ACC는 고통에 관여하는 뇌 영역으로, 놀라운 점이 있다면 ‘공감’ 도중에도 이 ACC가 선명하게 활성화된다는 점이다.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기 위한 뇌의 특정 부위가 타인의 것을 이해할 때도 활성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셈이다. 


 

인간의 ACC에 전기 충격을 가하면 어떤 감정이 생길지 의문을 지닌 채, 스탠퍼드대학교 파비지(J. Parvizi) 교수 연구팀은 인체실험을 시도했다. ACC는 고통을 맡아 담당하는 뇌 부위이기에 자극을 주면 고통과 괴로움을 느낄 것이라 예상했다. 실험 참여자의 말은 이렇다. ACC에 자극을 받음과 동시에 괴로운 어느 한 장면, 이를테면 ‘운전 중 폭풍우를 만나 쩔쩔매는 장면’ 따위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느낀 감정은 비단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이 어려움을 반드시 극복하겠다’라는 강렬한 의지가 솟아났다는 것이다.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 생생한 생生의지가 말이다. 이는 곧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우리의 뇌에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부추기는 회로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회로는 ACC를 자극했을 때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CC는 공감의 원천이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공감을 통한 고통으로도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를 발생시키는 이 회로는 우리에게 많은 바를 시사한다. 

 


우리가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인간은 타인의 슬픔을 즐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건 어려운 한편 슬픔을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건 너무도 쉽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할 필요는 바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며 이를 극복할 의지를 다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와 의지를 그런 식으로 찾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나눈다고 반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함께 지기를 선택하는 삶. 그런 삶은 기쁨이 있는 삶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우리에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과 기쁨이 내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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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신형철, 2018,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 이케가야 유지, 2018,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3가지 심리실험』, 사람과 나무사이, 

3. HiDoc[Website], (2021), 『우울할 때 슬픈 음악을 들어야 하는 이유』, 

   우울할 때 슬픈 음악을 들어야 하는 이유 (hidoc.co.kr) 

4. 일요신문[Website], (2022), 『화날 땐 포도당 음료를, 뇌과학으로 본 자기관리법』, 

   “화날 땐 포도당 음료를” 뇌과학으로 본 자기관리법 | 일요신문 (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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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5-21 22: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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