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윤
[The Psychology Times=허정윤 ]
하루에도 여러 감정이 우리를 왔다가 떠나간다. 때로는 그 감정은 아주 강렬하게 마음과 몸을 휘감아 온종일 그 감정 속에서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 크게 신경 쓰이지 않기도 한다. 어떤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우리는 감정 속에 있을 때에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지만, 놓여나는 일순간 그것은 내 마음이 형성한 하나의 틀이었음을 깨닫는다. 오는 대로, 가는 대로 감정에 온전히 신경을 할애하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감정, 또는 일평생 우리를 잠식한 감정에서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내 감정을 해석하고 이해해 본다면, 대책 없이 우리를 찾아온 감정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자신 있게 감정을 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에도 저마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사랑, 애정, 배려 등의 긍정적인 감정보다 분노, 두려움, 슬픔, 수치심처럼 부정적인 감정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한 감정들을 느끼면 안 좋고,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으로 생각하여 빨리 마음속에서 몰아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감정, 정서는 과거에 벌어졌던 여러 생존과 관련된 일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며, 적응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또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도록 조직화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분노’라는 감정은 우리가 설정한 목표에 지장이 생겼을 때,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두려움’은 상황에 문제가 생겼다는 경고하고 목표를 정해 도망갈 수 있게끔 한다. ‘슬픔’은 우리를 상황으로부터 철수하게 하거나,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하는 꽤 사회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혐오감’은 안 좋은 것들로부터 물러나게 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한다. 긍정 정서도 역할이 있다.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게 하고 고양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감정은, 특히 부정 정서는 억눌러야 할 것도, 느끼지 말아야 할 것도, 또는 빨리 마음속에서 내쫓아야 할 것도 아니다. 감정들은 저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며 사회에서 우리가 적응할 수 있도록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감정이 적절히 표현, 수용되지 않고 지나치게 억제 혹은 방출되는 경우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치료적 개입이 필요할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하나의 감정이라도 종류에 따라 대하는 방법이 다르다
슬픔이라고 해서 다 같은 슬픔이 아니고, 불안이라고 해서 다 같은 불안이 아니다. 감정이 형성된 상황과 이유에 따라서 같은 이름의 감정이라도 그 특징에 차이가 있고, 접근해야 하는 방식이 다르기도 하다. 대부분 하나의 감정은 ‘일차적 정서’, ‘이차적 정서’, ‘도구적 정서’의 세 가지 큰 유형으로 나뉘며, ‘일차적 정서’에는 적응적, 부적응적 정서가 있다. ‘일차적 정서’는 어떤 일에 대해 내가 최초로 경험하는 감정이다. ‘일차적 적응적 정서’는 건강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상실로 인해 느껴지는 슬픔이 그 예시이다. ‘일차적 부적응적 정서’는 내가 취약하거나 나쁘다고 만성적으로 느끼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온전하게 현재 상황 자체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과거에 겪었던 경험으로 형성되었던 부적응적인 무언가가 건드려져 현재 상황이 히스테릭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차적 정서’는 상황에 대한 최초의 감정이 아니고, 우울한 자신에 대해 화가 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해 수치스러워 하는 것과 같은 진짜 감정을 덮고 외부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도구적 정서’는 위로를 얻기 위해 슬픈 척을 하는 등 이득을 위해 정서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감정에도 다양한 유형과 역할이 있다. 대부분의 감정에서 ‘일차적 적응적 정서’는 충분히 느끼는 것이 필요하고, ‘일차적 부적응적 정서’나 ‘이차적 정서’는 그것을 일으키는 감정의 도식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다시 새로운 도식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정서가 어떤 정서이고, 그중에서도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무엇이 있는지, 어떤 기능이 있는지, 우리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가만히 바라본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현재 느끼는 부정 정서로 힘들고, 짜증나고, 빨리 지나갔으면, 하면서도 그 감정의 영향력 때문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감정을 온전히 느끼거나 수용하지도 못한다.
정서가 각각 어떤 특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면, 어떤 감정이 올라왔을 때 스스로가 진단을 내리며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으로 분노가 올라와 내 온갖 생각이 분노에 잠식당했다면, 화가 나는 와중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 지금 나를 휘감은 이 분노는 내 계획이 무언가 외부 상황에 의해 지장을 받아 그것을 극복하도록 하는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군. 또 이 상황에 대해 일어난 최초 감정이니까 일차적 적응적 분노겠군. 지금은 이 분노가 효과적으로 행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충분히 이해해주겠어.’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감정의 발생이 정상적인 과정임을 이해하고, 내 감정을 잘 받아들이고 다루어 지나가도록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다.
물론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의 조절에 대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상담소나 병원을 찾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다룰 수 있는 수준의 감정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정서가 무엇인지,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인지하고 대면하는 것이 한층 마음을 안정시키고, 감정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돕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난기사
Greenberg, L. S. (2002). Emotion-focused therapy: Coaching clients to work through their feelings.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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