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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윤서정 ]




지난 10월 10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소식에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쾌재를 부르며 축하를 전하기도 했고, 한강 작가의 책을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점에 줄을 서는 흔치 않은 풍경을 자아내기도 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올해 초부터 계속 이야기되어 온 일명 ‘텍스트 힙’,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독서 열풍을 전 세대의 ‘독서 붐’으로 끌어올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작가는 수상 직후 <매일경제>와의 지면 인터뷰에서 ‘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독서라는 행위는 독자의 집중력, 지구력, 인지적 수행을 동반하기에 몸과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 작가는 자신을 치유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독서를 꼽는 듯하다. 독서 행위가 정말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독서가 주는 치유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카타르시스와 소격 효과


먼저 내러티브를 감상하는 경험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알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라는 효과에 주목했다. 카타르시스란 ‘씻어냄’이다. 관객들은 인간의 행동을 모방한 비극을 관람하면서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감정을 씻어내는 즐거움을 달성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문학을 읽을 때도 나타난다. 인간의 삶과 행위를 모방하는 문학 속 인물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감정에 직면한다. 우리는 문학에 몰입하며 감상할 때 느낀 감정을 실제 삶과 비교하게 된다. 문학을 감상하며 형성된 감정은 현실을 살아가며 느낀 날것의 감정을 개인의 특수한 것으로 놔두지 않으며 정당화하는 단계를 거쳐 어느 정도 해소된다.

 

카타르시스가 인간 행위를 모방한 극을 보고 얻는 효과라면, 의도적으로 낯선 극을 보고 얻는 감정 효과도 있다. 이를 소격 효과(Alienation effect)라고 한다. 소격 효과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희극 이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주창한 효과로, 그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극을 거부하고 관중들이 자신들의 눈 앞에 펼쳐진 연극적 환상을 의식하는 극을 만들고자 했다. 극작가와 무대연출가가 의도적으로 극을 ‘낯설게 하는’ 것이다. 문학을 읽는 독자도 자신이 읽는 작품과 거리를 두고 독자가 능동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행위에 푹 빠질 수 있다. 독자는 원한다면 자신의 현실과 일시적인 단절을 선언하고 허구임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는 문학 속에서 언제든지 헤엄칠 수 있다.



책이라는 세계


책에 몰입하든, 거리를 두고 감상하고 평가하든 무엇보다 독서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바로 ‘길게 지속되는 세계’에 있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한 번 접하면 몇 시간 동안 몇백 개의 영상을 보게 되는 숏폼 컨텐츠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숏폼 컨텐츠는 말 그대로 길이가 짧고, 다양한 주제, 많은 개수의 영상을 한꺼번에 접하게 되기 때문에 주의가 분산되기 쉽다. 또한 인터넷 속 걸러지지 않은 날것의 댓글이나 가짜 뉴스를 보다 보면 피로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책은 감상하고 경험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길게 시간을 들여야 하고, 주의가 분산될 일 없이 일관적으로 지속되는 하나의 세계를 갖추고 있다. 현실에 지쳤을 때 그들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마음껏 도망갈 수 있는 여유도 제공한다. 책의 화두가 가리키는 소실점을 향해 홀로 길을 떠나야 하지만, 그 길은 꽤 오래도록, 평탄하게, 원한다면 현실과 분리된 채 이어져 있다.

 

결론은 책이 가진 치유의 힘이란 산책이나 명상이 마음 챙기기에 도움이 되는 것과 유사하다. 지속되는 일관성을 갖춘, 내가 신경 쓰던 것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세계가 몰입을 돕고 지친 마음 한숨 돌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딴에는 최근의 독서 유행이 ‘과시용 독서’라며 조롱하는 듯한 분위기도 보인다. 그러나 과시용이면 좀 어떠한가? 얄팍한 동기로 시작했더라도 지속하면 결국 내 세계가 된다. 독서를 과시하는 게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크나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사람들이 다들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고 책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여태 책을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경험이 될 것이고, 책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세계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책을 좋아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못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오랜만에 지치고 조각난 마음을 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모두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참고문헌

1) “[한강 단독 인터뷰] “고단한 날,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전문]“ <매일경제> (2024.10.11.) https://www.mk.co.kr/news/culture/11137036

2) 이윤철, (2023),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서 비극의 그럴듯함(eikos), 서양고전학연구, 제63권 제1호, 41-77p

3) 나무한, 김명삼, (2018),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나타나는 소격 효과 요소를 통한 애니메이션 분석 사례 연구 -애니메이션 릭과 모티(Rick and Morty)를 중심으로-, 조형미디어학, 제21권 제3호, 58-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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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11-07 16: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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