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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신경민 ]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의 생활 방식과 행동 양식, 가치관, 정서 등 전반적인 삶에 크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과 대개 비슷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반면, 문화의 차이가 큰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과는 서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대표적인 문화 차이의 예는 서양의 개인주의적 문화와 동양의 집단주의적 문화가 있다. 

 

'사회적 자기(social self)'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신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개인주의적 문화권의 사람들은 '나는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와 같이 개인적 특징을 중심으로 '나'를 정의했지만, 집단주의적 문화권은 '나는 ~에 속한 사람입니다.'와 같이 사회적 소속을 중심으로 '나'를 정의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자율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문화와 상호의존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적 문화의 차이가 각 개인의 아주 사소한 가치관에까지 스며들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문화의 영향력은 사람들이 겪는 각종 심리적 이상행동과 정신질환에서도 드러난다. 




 특정 문화권에서만 나타나는 '문화특수적 증후군'



우리가 흔히 아는 우울증, 불안장애,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은 여러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특정 문화권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심리적 이상행동과 정신질환이 있는데, 이를 '문화특수적 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화특수적 증후군은 'DSM-IV(미국정신의학협회 APA에서 발표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서 제시된 것으로, 문화에 따라 경험하게 되는 주요 스트레스의 유형이 다르고 이에 대처하는 방식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특정 문화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증후군인 것으로 해석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체념 증후군의 기록’ 포스터 (사진 출처 = NETFLIX)예를 들어, '체념 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은 아동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오랜 시간 동안 수면 상태에 빠지는 증후군이다. 이는 특히 2000년대 초 스웨덴에 거주하던 난민 아동들에게서 많이 발생한 문화특수적 증후군으로 알려져있다. 

 

이 증후군을 겪었던 아동들은 단지 며칠간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스웨덴에서의 정식 망명 허가를 받은 이후에야 잠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체념 증후군의 구체적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난민 아동들의 무기력함과 스트레스가 잠으로 표현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렇듯 문화특수적 증후군은 특정 문화에서 겪는 스트레스와 심리적 문제로 인해 나타나는 특수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특수적 증후군은 무엇일까? 




한국의 문화특수적 증후군 ➀ 화병




"아 화병 난다." 

 

한국인이라면 익숙할 '화병(火病)-Hwa-byung'을 일종의 비유적 표현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화병은 DSM-IV에서 '분노의 억제로 인해 독특하게 발생하는 한국의 분노 증후군'으로 분류된 실존하는 심리적인 병이다.

 

화병이란 정신적 스트레스를 억제하며 발생하는 병으로, 우울증과 신체화 장애, 불안장애의 증상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심리 장애로 여겨진다. 주요 증상으로는 두통, 심계항진, 답답함, 소화 장애 등의 신체화 증상과 우울, 불안, 신경질, 무기력, 과도한 분노 등의 정신 증상으로, 대개 만성적인 경과를 나타낸다. 

 

화병은 주로 중년 이후의 여성, 사회경제적 및 학력이 낮은 계층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이는 특히 그러한 여성들이 고부 갈등, 결혼 생활 및 자녀 등 대인관계 갈등에 의해 쌓인 정서적 고통을 분출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억압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그렇게 억압된 감정이 ‘울화’의 형태로 내면화되어 각종 증상으로 표출되면서 화병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도하게 술에 의존하는 '알코올 사용장애'는 남성에게 흔하고, 과거 유교적 문화로 인해 술을 통한 감정 표출마저 허용되지 않았던 여성에게는 화병이 흔히 나타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특수적 증후군 ➁ 신병


 영화 '파묘' 스틸컷

'신병(神病-Shin-byung)'은 간단히 말하면 무당이 되기 전 앓게 되는 병으로, 무당이 되기 위해 통과의례처럼 필수적으로 겪어야 하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신병의 증상은 다양한데,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갑자기 시름시름 앓는 것, 몸에 마비가 오거나 이유 없이 몸이 마르는 것, 신비스러운 현상을 체험하는 것, 괴이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 등이 있다. 

 

신병의 증상이 본격화되면 정서적 불안과 함께 환각, 환시 등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러한 증상은 ‘굿’을 통해 호전되고 무당이 되는 내림굿을 통해 치유된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러한 신병을 신체화 장애, 불안장애, 해리 장애, 정신증의 복합적인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신병 또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한국의 종교적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이 심리적 고통에 대처하는 흔한 방식 중 하나는 바로 초자연적인 존재에 고통의 원인을 투사하고 의존하는 것, 즉 종교를 믿는 것이다. 

 

그러한 의존적인 무속 신앙적 종교관의 맥락에서, 신병은 정신장애와 초자연적 존재를 연관 지어 굿과 같은 샤머니즘적인 방식을 통해 치유하려는 전통적인 종교 문화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신병을 정신질환의 일종이 아닌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신과의 접합 과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현대 의학은 신병을 치유하지 못하지만, 무속 의례를 통해 신병을 해결할 수 있으며, 신병을 앓는 사람은 대개 어렸을 때부터 신병의 기를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신병의 잠재적 기는 아주 오랜 기간 서서히 진행되며 일종의 유전성을 지니기 때문에 단순히 정신질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병은 원인과 증상을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는 한국에 존재하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질환에 드러나는 한국의 문화


 

-가해의식형 사회공포증


사회공포증은 불안장애의 하위 유형으로,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정신질환이다. 사회공포증을 겪는 환자들은 타인의 시선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비합리적인 공포 반응을 보인다. 

 

주목할 점은, 문화권에 따라 사회공포증의 유형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서양 문화권의 경우, 사회공포증의 주된 원인은 사회적 상황에서 겪게 될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반면, 동양권, 특히 한국인과 일본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상황을 두려워하고, 이에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는 '가해의식형 사회공포증'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가해의식형 사회공포증을 겪는 경우, 자신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타인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믿기도 하는데, 이러한 ‘망상형’ 사회공포증 환자가 한국과 일본에서는 전체의 약 40%에 해당하는 가장 흔한 사회공포증 유형이다. 

 

이는 앞서 처음에 언급했던 서양의 개인주의적 문화와 동양의 집단주의적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타인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원만한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집단주의적 문화와 더불어, 상대방에 대한 불쾌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동양인들은 타인의 감정과 태도를 간접적으로 눈치채고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이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한다.’와 같이 인지적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망상형 사회공포증 환자의 비율이 유독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조현병의 망상 내용

 

조현병은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를 보이는 정신질환으로, 주로 환청, 망상, 이상행동, 횡설수설 등의 주요 증상을 보인다. 

 

조현병의 망상 내용은 문화적,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는데, 실제로 조현병을 지닌 한국인의 경우 피해망상, 과대망상, 죄책망상에서 타 문화권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나타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한국인 조현병 환자의 망상 주제는 가족 및 애정 관계, 성적인 피해, 사업 및 경제적 문제인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망상의 내용이 시대적 변천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6.25 전쟁 이후에는 공산주의자, 간첩과 같은 망상 내용을 보이는 환자가 많았던 반면, 문민정부 이후에는 통일이나 사회정치적 단체에 관한 피해의식이 망상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여성의 경우, 주로 성적, 종교적, 초자연적 주제에 관한 망상 내용이 많다. 

 



이처럼 문화특수적 증후군은 특정 사회의 문화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앞선 신병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문화특수적 증후군은 원인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어딘가 기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러한 증후군들에는 모두 특정한 문화적 요소가 긴밀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리적 장애와 정신질환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이해하고 싶다면, 이러한 문화의 영향에 조금 더 주목해보면 어떨까? 




[참고문헌]

(1) 권석만. (2013). 현대 이상심리학. 서울: 학지사.

(2) 김유라. (2020.12.30.). [Opinion] 삶에 먹혀버릴 때, 체념 증후군의 기록 [사람].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491

(3) 김지훤, 박보라, 김태헌, 류영수, 강형원 & 장현호. (2009). 화병환자의 MMPI 프로파일과 성격특성 연구. 동의신경정신과학회지, 20(3), 189-203.

(4) 양종승. (2000). 무당의 신병과 신들림. 한국무속학, 2, 113-131.

(5) 정희진. (2024.10.22.). 체념의 힘. 경향신문. https://url.kr/bacjr1

(6) Gilovich, Keltner, Chen & Nisbett. (2019). Social Psychology. New York: W.W. Norton &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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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12-02 09: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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